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영천 자천교회

발행일 2020-11-24 20:00:0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1898년 권헌중 장로 초가삼간 구입해 서당 겸 기도소 사용

교회 세우기 위해 주재소와 면사무소 지어 주기도

자천교회, 한국 교회 초기 모습 간직…역사적 가치 뛰어나

경북문화재자료 제452호로 지정된 자천교회는 우리나라 한옥 교회 중 두 번째로 오래된 교회다. 1898년 세워진 이 교회는 경주에서 서당 훈장을 하던 권헌중이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분노해 일제에 항거하다 일경의 추격을 피해 청송으로 피신 중 그곳에서 만난 미국인 선교사 아담스의 전도로 지은 곳이다. 교회의 구조와 외관은 한국 목조건축 양식을 이용했으나 내부 공간은 바실리카 식 교회 양식이 일부 사용돼 동·서양의 건축기법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김진홍 기자 solmin@idaegu.com
경북 영천 화북면에는 우리나라 초기 교회 모습을 간직한 교회가 있다.

바로 ‘자천교회’다.

자천교회가 위치한 화북면은 태백산맥의 준봉인 보현산을 끼고 이로부터 발원한 횡계천과 고현천이 흐르고 있어 예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자연 환경을 가지고 있다.

현재 젊은이들이 다 떠나간 후 대부분 어르신들이 살고 있지만 과거에는 번성한 마을 중 하나였다.

자천교회를 조그마한 시골 동네에 있는 교회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천교회는 우리나라 초기 교회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전국은 물론 해외에서도 이곳을 찾는다.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전에는 1년에 3만여 명에 가까운 국민들이 찾았다.

특히 자천교회를 설립한 권헌중(1865~1925) 장로에 대한 이야기는 각박해지고 있는 시대에 꼭 필요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자천교회 예배당 앞에 있는 종탑.
◆자천교회 시작, 그리고 과거와 현재

영천 화북면 보현산 자락에 있는 자천교회는 미국 북 장로교에서 파송된 제임스 아담스(안의와)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인 권헌중 장로가 세운 교회다.

제임스 아담스 선교사는 1895년 한국에 입국한 후 대구·경북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펼쳤다. 1898년 4월 전도차 대구에서 영천을 거쳐 청송으로 순회하던 중 영천과 청송의 경계 지점인 노귀재에서 권헌중을 만나 선교했다. 같은해 10월 권헌중이 화북면 자천동의 초가삼간을 구입해 서당 겸 기도소로 사용하면서 자천교회의 역사는 시작됐다.

이후 교회가 조금씩 번성하게 되자 권헌중 장로는 좀 더 큰 예배당의 필요성을 깨닫고 자신의 사재를 들여 1904년 현재의 16칸 목조건물의 예배당을 완공했다.

이렇게 시작된 자천교회는 예배당 건축 이후 마을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 나갔다.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 외에 나라와 민족을 위한 교회의 사회적인 역할을 함께 펼쳤다.

권헌중 목사는 암울한 민족의 미래를 밝혀나가기 위해 교육 사업에 힘을 쏟았다. 구식인 서당 교육을 벗어나 신식 교육의 필요성을 느낀 권 목사는 선교사들이 실시한 근대식 학교 교육 제도를 도입해 자천교회 예배당에 ‘신성학교’라는 2년제 소학교를 설립했다. 주일학교가 아닌 교회학교로서 근대식 공교육의 현장이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의 수탈이 이어지면서 자천교회 또한 어려움에 직면했다.

자천교회의 대들보였던 권헌중 장로가 1925년 별세해 교회의 앞날은 더욱 암담했다. 그러나 1930년대 이르러 도회지에서 전입해 온 양재황, 이복조 부부의 헌신으로 활기를 되찾았다.

일제가 대동아전쟁에 광분해 전쟁 물자를 공급하고자 전국에 걸쳐 잔혹한 수탈을 자행한 당시 자천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교회의 귀중한 종이 공출 당하기도 했으며 일제가 예배당에 가마니를 생산하는 공장을 만들어 교인들의 노동력을 착취했다.

일제의 핍박을 버틴 자천교회는 광복을 맞아 교회 재건에 힘썼다.

하지만 좌우 이념 대립으로 피해를 받았다.

대구 10·1사건 여파가 영천 자천리 마을까지 전해졌다.

좌익 가담자들이 준동해 우익 인사들에게 해를 가했고 그 과정에서 자천교회 부속 건물이 전소되는 등 피해를 입었다.

6·25전 발발 후 얼마 되지 않아 영천이 북한군의 점령지가 되자 자천교회 예배당은 북한군 사무실로 사용되기도 했다.

북한군에 대한 미 공군의 폭격으로 예배당이 파손될 위기에 처했을 때 교인들이 예배당 지붕에 하얀 횟가루로 ‘CHURCH’라고 표시해 예배당을 보존한 일화는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져 오고 있다.

자천교회 예배당 앞 뜰에는 권헌중의 묘와 기념비가 있다.
◆권헌중의 노블리스 오블리주

자천교회를 세운 권헌중 장로의 인생은 파란만장하다. 오롯이 나라와 지역민을 위해 일생을 보냈다.

그는 경주에서 서당훈장을 지냈다.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자 의병으로 활동을 했다. 의병활동의 전력 때문에 일제의 감시를 피해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녔다. 청송과 영천의 경계가 되는 노귀재를 넘던 중 아담스 선교사를 만나 복음을 받아들였고 대구로 가고자 했던 계획을 취소하고 지금의 영천 화북면 자천리에 정착했다.

이곳에 교회를 세우려고 하니 자천리 주민의 반발이 심했다.

당시 선교사들에 의해 기독교, 천주교가 들어오고 있었지만 여전히 시골 마을에서는 유교적 가치관이 완고했던 터라 “우리 마을에 야소교가 웬 말이냐”며 반대에 부딪쳤다.

이에 권 장로는 당시 마을이 꽤 번성해 주재소와 면사무소가 있음에도 제대로 된 건물이 없음을 간파하고 “내가 마을에 주재소와 면사무소 건물을 지어 줄 테니 교회를 세우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제의했다.

결국 마을로부터 교회 설립을 허락받은 권헌중 장로는 초가삼간 한 채를 구입해 서당을 겸한 교회를 시작하게 됐다.

기도처처럼 교회를 시작하다 보니 서당 겸 가정교회로 출발했다.

교인이 늘기 시작하자 예배당 역시 사재를 털어 지었다.

자천교회 내 있는 신성서당.


애초 교육자, 민족의식을 가졌던 권 장로는 ‘신성학교’를 세웠다. 1913년 1회 입학생을 모집했는데 당시 50명이 모였다. 이중 여학생은 단 1명이었는데 자신의 딸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가정에서 “계집아이 글 가르쳐서 뭐하느냐”며 딸자식을 보내지 않자 권헌중 장로가 주민들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솔선수범했다.

이후 학교가 마을에 긍정적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마을 주민의 인식이 바뀌기 시작, 여학생들도 하나 둘씩 늘어나게 됐다.

자천교회는 선교사가 재정적 지원을 해준 교회가 아니다 보니 권 장로의 고심은 깊어져 갔다. 교회에 빚이 생기자 권헌중 장로는 자신의 논밭을 팔아서 빚을 갚았다. 자기 살던 집을 담보로 잡혀 있었고 결국 다른사람에게 넘어갔다.

신성학당 새별배움터 입구.


현재 자천교회 부지는 예배당과 전국에서 유일한 전통 한옥 교육관인 신성학당(새별배움터)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신성학당이 있던 부지는 영천의 한 재력가에게 넘어가면서 예배당과 신성학당은 돌담으로 단절돼 있었다.

신성학당 새별배움터.


권헌중 장로의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마음이 통했을까.

2007년 신성학당 부지의 주인의 아들이 교회에 기증을 했고 초창기 교회 터 일대 모습을 되찾을 수 있게 됐다.

과거 권헌중 장로가 살았던 곳이자 재력가가 살았던 이 집은 오늘날 신성학당으로 재탄생됐고 이곳에서 전국 유일무이한 ‘처치스테이’가 진행되고 있다.

교회 예배당.
◆개신교 초기 한옥 예배당

자천교회의 역사적 가치는 독특한 예배당 구조를 들여다보면 한 눈에 알 수 있다.

자천교회 예배당은 전국적으로 몇 안 되는 개신교 초기 한옥 예배당으로서 독특한 ‘ㅡ자형’ 구조를 가졌다. 한국 교회의 전통적인 한옥 예배당은 ‘ㄱ자형’, ‘정방형’, ‘장방형’ 등의 형태가 일반적이다.

자천교회는 똑같은 장방형 집 두 채를 나란히 ‘ㅡ자형’으로 배치한 겹집 양식이다.

‘ㅡ자형’ 겹집 구조로 독특한 지붕 모양을 갖게 됐다. 자천교회의 지붕은 아주 짧은 용마루를 가진 ‘우진각’ 형태로서 이는 전후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모양이다.

자천교회 지붕이 극단적으로 짧은 용마루를 갖게 된 원인은 내부의 종도리(상량)가 활처럼 굽은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종도리는 일직선으로 곧게 돼 있으나 자천교회 예배당은 종보 위에 동자기둥을 세우고 이를 연결점으로 해 종도리를 활처럼 굽게 했다.

겹집 구조는 넓고 높은 지붕을 갖게 했다. 따라서 지붕의 하중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고 이를 지탱하기 위해 서까래를 촘촘하게 깔았으며 실내에 기둥 4개를 세웠다.

이 기둥들을 자세히 보면 선인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중앙의 기둥 열을 따르면 강대상에도 수직 기둥이 있어야 하지만 이를 아치형의 기둥으로 대신해 강대상 공간을 자연스럽게 확보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자천교회 예배당 내부는 나무판으로 칸막이 세워 남녀 좌석을 구분했다.
또 초기 한국 교회 예배당의 칸막이는 대부분 천으로 휘장을 쳐 남녀를 구분했지만 자천교회는 나무 칸막이를 설치했다. 그 이유는 중앙의 기둥들 때문에 휘장을 치는 것에 방해가 되므로 기둥과 기둥 사이를 나무로 잇대어 칸막이로 사용했던 것이다. 그리고 회중석에 앉아서 보면 벽처럼 높은 칸막이 때문에 답답함을 느낄 수 있지만 강대상의 중앙에서 보면 칸막이는 기둥에 가려 보이질 않아 설교자는 마치 열린 공간에서 설교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분리된 남녀 공간이 완전히 대칭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자천교회 예배당 건축의 또 다른 특징 하나는 투박하지만 지극히 서민적이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한옥 예배당 가운데 제일 오래되고 고급스런 성공회 강화읍성당 예배당(1900년 건축)과 견줘볼 만하다.

자천교회는 시골 목수의 세련되지 못한 솜씨와 인근 보현산에서 난 목재를 가지고 나무 모양 그대로 투박하게 지었지만 나름대로 많은 지혜를 발휘한 흔적들이 보인다. 그 한 예로 예배당 안 뒤편에 온돌방을 좌우 대칭으로 배치하고 들문을 달아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아늑함을 표현했다.

자천교회 예배당의 건축 양식과 기법들은 예배당은 물론 일반 한옥 구조물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독특한 특징들이 있어 교회사적, 건축사적으로 상당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뛰어남에도 아직까지 국가지정문화재로 등재되지 못한 채 경북도 문화재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교회 예배당 옆 우물.


일반적으로 이전 세대가 남긴 신앙의 역사적 유산은 유형의 것과 무형의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예배당과 같은 건축물을 비롯해 서적 등을 말하며 후자는 과거 믿음의 선진들로부터 오늘의 우리들에게 전하는 신앙 삶, 정신, 운동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 점에서 자천교회는 유형과 무형을 모두 갖춘 유산이다. 이미 한국 교회에서 자천 교회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개신교의 초입 이래 토착화로부터 시작해서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가 뿌리를 내리는 전 과정의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경북도를 비롯해 영천시에서 많은 관심으로 오늘날의 자천교회 모습이 지속되고 있지만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인다면 경북을 넘어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유산으로 거듭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신헌호 기자 shh24@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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