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꽃이 피는 데는 얼마간의 어둠이 필요하다

발행일 2020-06-29 15:20:37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나팔꽃이 피는 데는 얼마간의 어둠이 필요하다

박정남

나팔꽃은 새벽 두 시에서 네 시 반 사이에 핀다 나팔꽃이 피는 데는 얼마간의 어둠이 필요하다 이제 나팔꽃은 하나같이 아침 일찍 일어나라고 나팔 불지는 않는다 그때 스무 살의 나에게 쓸데없이 연애 경험 있느냐고 물어오지도 않는다 하지만 나팔꽃은 아침 일찍 피어 내 어린 날처럼 따라다녔으면 좋겠다 동네방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면 크게 나팔 불어 소문을 내주었으면 좋겠다 나팔꽃은 햇빛과는 상관없이 어둠 속에서 핀 꽃이다 어둠 속에서 네가 본 것이 무어니? 너의 어둠은 무엇이었니? 더욱 또록또록해진 눈을 뜬 아침의 나팔꽃에게 이제는 내가 나직이 물을 차례다

『현대문학』 (2007년 3월호)

나팔꽃은 여름철에 피는 청자색 또는 백색, 홍색 등의 나팔 모양의 꽃이다. ‘나팔꽃은 새벽 두 시에서 네 시 반 사이에 핀다.’ 새벽 일찍 잎겨드랑이에서 꽃이 피었다가 낮에는 햇빛에 오므라들어 시든다. 성마른 만큼 뒷심이 부족하다. ‘꽃밭에서’란 동요가 초등학교 음악책에 수록되어 애창되는 바람에 주인공으로 출연한 나팔꽃은 전 국민에게 사랑받는 스타 꽃이 되었다.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선화도 한창입니다. 아빠가 매어놓은 새끼줄 따라 나팔꽃도 어울리게 피었습니다.’ 아빠가 일궈놓은 꽃밭에서 채송화, 봉선화, 나팔꽃을 보면서 돌아가신 아빠에 대한 추억을 노래한 마단조의 애절한 곡조가 아직도 내 가슴에 깊이 아로새겨져 있다.

나팔꽃은 어둠 속에서 비밀스럽게 피어나는 부지런하고 상미 급한 꽃이다. 막상 햇빛이 비치는 대낮엔 고개 숙이고 존다. 새벽녘에 눈을 뜬 만큼 따뜻한 햇살이 비치면 졸음이 쏟아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시인은 나팔꽃의 비밀을 직관을 통해 날카로운 눈으로 투사한다. 나팔꽃은 새벽에 일어나 게으름뱅이에게 모범을 보이고, 늦잠 자는 잠꾸러기를 깨운다. 나팔꽃은 매일 새벽 기상나팔을 분다. 나이가 지긋한 시인은 기상나팔을 불지 않아도 일찍 깨어있다. 나팔꽃은 어둠 속에서 본 많은 비밀을 알고 있었다. 남의 은밀한 비밀을 말하고 싶어 몸살이 날 정도다. 새벽같이 눈을 떠서 동네방네 나팔을 불고 다녔다. 연분홍빛 사연을 많이 간직한 스무 살의 사춘기 숫처녀에겐 나팔꽃은 두렵고 미운 꽃이었다.

그러나 이젠 길가에 쇠똥만 보고도 부끄러워 웃던 그 시절이 그립다. 새벽같이 일어나 사람을 따라다니며 좋은 소식을 동네방네 나팔 불고 다녔으면 좋겠다. 연분홍빛 사연을 소문낼까봐 가슴 조이던 스무 살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연애 경험이 있느냐고, 숨겨둔 연인이 있느냐고, 물어봐 주어도 화내지 않겠다. 나팔꽃에게 묻는다. 네가 어둠 속에서 본 것이 무엇이냐. 네 어둠의 정체는 또 무엇이냐. 이젠 모든 걸 이야기 해 줄 수 있겠지. 그 대신 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지 보여줄 수 있어. 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지 말해 줄 수 있지. 그러면 서로 공평하지 않겠니. 네가 본 것, 네가 들은 것, 네가 아는 것, 모두 나팔 불어도 좋아.

이젠 나팔꽃이 아침마다 나팔 불지 않아도 새벽 일찍 눈을 뜬다. 이번엔 시인이 나팔꽃을 어둠 속에서 지켜본다. 나팔꽃이 두 눈을 또록또록하게 뜨고 있는 이른 아침에 마음을 다잡고 다그친다. 해가 하늘로 치솟아 올라 눈이 그물그물해져서 축 늘어지기 전에 나팔꽃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이젠 시인이 나팔꽃의 은밀한 비밀을 나팔 불고 다닐 차례다. 나팔꽃아, 세상만사 돌고 돈단다. 그게 세상이치란다. 오철환(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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