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일반

삼국유사 기행(27)효소왕대의 죽지랑

신라 32대 효소왕은 6살에 즉위, 어머니 신목왕후가 섭정했다.

신라 32대 효소왕릉. 경주 조양동 성덕왕릉 서쪽에 나란히 있다. 효소왕은 신문왕의 아들로 6살에 즉위해 어머니 신목왕후가 섭정했다.


효소왕릉은 호석 없이 흙으로만 조성된 고분으로 보인다. 봉분 하단 둘레게 다듬어진 듯한 굵은 돌이 가끔씩 돌출되어 호석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효소왕릉 입구에서 보면 주변이 소나무 숲으로 둘러쌓여 있지만 일반 왕릉에 비해 크기가 작아 탐방객들을 안타깝게 한다.
효소왕릉의 입구는 소나무 숲길이어서 산책로로 인기다.
효소왕릉과 성덕왕릉으로 접근하는 입구에 철길이 있지만 건널목이 없어 먼 거리를 둘러야 하는 불편이 있다.
효소왕릉의 상석은 일반 왕릉의 것에 비해 규모도 적지만 깨져 있다.
사천왕사지와 마주 보고 있는 망덕사지 터의 당간지주. 안정적으로 아랫부분은 두텁게 위로 올라갈수록 가늘게 조성하고, 특이하게 가운데 구멍은 없고 윗부분에 홈을 파서 당간을 고정하게 했다.
신라시대 진덕여왕, 무열왕, 문무왕, 신문왕 등 4왕에 걸쳐 화랑과 대신으로 활약했던 죽지랑에 대한 연구와 복원사업이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 경주동궁원에 죽지랑관이 만들어져 신기한 식물들을 체험하게 한다.
국보 제28호 백률사 약사불은 신비스런 영험담이 많아 관심을 끈다. 경주 소금강산 백률사에 있었는데 1930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보관 전시되고 있다.
낭산 동쪽의 황복사지삼층석탑. 일제시대 1943년에 해체수리 되면서 사리함의 뚜껑에 효소왕 원년인 692년에 건립된 것으로 기록된 것이 발견됐다. 탑에서 나온 사리함에 새겨진 명문에 효소왕이 돌아가신 신문왕의 명복을 위해 3층석탑을 건립했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효소왕은 신문왕의 아들로 6세에 즉위해 어머니 신목왕후의 섭정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나이가 어려 섭정으로 정치가 진행되면서 효소왕의 에피소드가 여러 곳에서 일어나 전해진다.

효소왕은 즉위해 11년 만에 죽어 이렇다 할 업적은 없다. 낭산 동쪽에 아버지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황복사지 삼층석탑이 확인되고 있지만 어머니의 주문으로 세운 것으로 이해된다. 망덕사 법회에서 진신석가와의 이야기, 만파식적 보물 잃어버린 것과 죽지랑, 부례랑 등 화랑들의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효소왕의 죽음에 대한 의문은 아직 제대로 풀리지 않고 있고, 33대 왕으로 동생 성덕왕이 즉위해 35년간 집권한다.

삼국유사 효소왕대 죽지랑 이야기의 요약과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두 가지로 나누어 써본다.

◆삼국유사: 효소왕대의 죽지랑

제32대 효소왕 때에 죽지랑의 무리 가운데 득오 급간이 있었다. 이름을 화랑의 명부에 올리고 날마다 나오더니 열흘이 넘도록 보이지 않았다. 죽지랑이 그 어머니를 불러 아들의 행방을 물었다.

득오의 어머니가 “당전 모량의 익선 아간이 제 아들을 부산성의 창고지기로 발령했습니다. 서둘러 가야 할 길이 급해 낭께 사직 인사를 드릴 겨를도 없었지요”라고 답했다.

죽지랑은 떡 한 바구니와 술 한 병을 가지고, 아랫사람을 거느리고 득오를 위로하러 갔다. 낭도 137인이 또한 의식을 갖춰 따르며 부산성에 이르러 문지기에게 물었다.

“득오가 어디 있느냐?”

“익선의 밭에서 순서에 따라 일을 하고 있습니다.”

죽지랑은 밭으로 가서 가지고 온 솔과 떡을 먹이려고 익선에게 시간을 달라 하면서 함께 돌아가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그러나 익선은 완강하게 막으면서 내주지 않았다.

마침 관원 간진이 퇴화군에서 세금 30석을 거두어 서울로 옮기다가 낭이 낭도를 귀중히 여기는 모습을 아름답게, 그리고 익선의 꽉 막힌 태도를 답답하게 여겨, 가지고 가던 30석을 익선에게 주고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들어주지 않았다. 사지 진절이 타고 가던 말에서 안장을 풀어주자 그때서야 허락을 했다.

조정의 화주가 이 말을 듣고 사람을 시켜 익선을 잡아 그 더럽고 추악한 때를 씻어 주라 하니, 익선이 도망가 숨어버렸다. 그러자 겨울에 익선의 아들을 잡아 성안의 연못에서 목욕을 씻겨 얼어 죽게 했다.

처음에 술종공이 삭주도독사가 되어 임지로 가는데 때마침 온 나라가 전쟁통이라 기병 3천 명으로 지켜주게 하였다. 죽지령에 이르자 한 거사가 그 고개의 길을 닦고 있었다. 공이 그것을 아름답게 여기고, 거사 또한 공의 떨치는 기세가 매우 엄중함을 좋게 여겼다. 서로 마음이 통했다.

공이 삭주에 부임해 다스린 지 보름쯤 지나 꿈에 거사가 방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부인도 같은 꿈을 꾸어 더욱 놀라, 다음 날 사람을 시켜 그 거사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보게 했더니 죽었다. 그 죽은 날이 꿈을 꾼 날과 같았다. 공이 “아마도 거사가 우리 집에 태어날 모양이다” 하고, 다시 아랫사람들을 보내 고개 위 북쪽 봉우리에 장례를 치르게 하고, 돌미륵 하나를 만들어 무덤 앞에 모셨다.

아내는 꿈을 꾼 날로부터 태기가 있어 태어나자 죽지라 이름 지었다. 어른이 되어 공직에 나가 김유신과 함께 부수가 되어 삼국을 통일했다. 진덕여왕, 태종무열왕, 문무왕, 신문왕 4대에 걸쳐 재상을 지내며 나라를 발전시켰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죽지랑과 망덕사

-망덕사 유감: 망덕사는 경주시가지와 불국사역을 잇는 7번 국도를 사이에 두고 사천왕사와 마주보고 있다. 사천왕사터에서 동남산의 화랑교육원으로 들어가다 보면 화랑교가 나오는데 다리 남쪽으로 펼쳐지는 논두렁 사이에 망덕사터가 있다.

망덕사는 당나라 사신에게 사천왕사를 감추기 위해 갑자기 지은 호국사찰이다. 당나라 고종이 대군을 파견해 신라를 침공했으나 잇따라 실패하자 김인문과 함께 옥에 가두었던 박문준을 불러서 그 연유를 물었다. 박문준은 당나라에 입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경주 낭산 남쪽에 새로 절을 지었다고 들었다고만 대답했다. 고종은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사신을 신라에 보냈다. 당으로부터 사신이 온다는 말을 들은 신라에서는 사천왕사를 숨기기 위해 사천왕사 남쪽에 새로 절을 짓고 사신을 기다렸다.

도착한 당의 사신을 새로 지은 절로 안내했더니 그 사신이 문밖에서 “이 절은 사천왕사가 아니고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다”하고 절로 들어서지도 않고 돌아섰다. 신라는 황금 천 냥을 주고 사신을 매수했다. 사신이 “신라에서는 과연 사천왕사를 지어 황수를 비옵디다”하고 거짓 보고했다. 새로 지은 절의 이름은 그 사신의 말대로 망덕사라했다.

효소왕이 망덕사 법회에 참석했다. 허름한 차림의 스님이 왕에게 법회 참석을 부탁해 효소왕은 허락했다. 법회가 끝날 즈음 어렸던 효소왕이 스님에게 농담조로 “스님은 어느 절에서 오셨습니까”라고 묻자 스님은 “남산 비파암에 있습니다”고 답했다.

“스님은 돌아가시면 왕이 친히 공양하는 음식을 받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자 “왕께서도 석가의 진신에게 정성을 바쳤다고 말하지 마십시오”라 말하고 스님은 몸을 날려 남산 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효소왕은 크게 놀라 부끄러워하며 남산쪽으로 절을 하고, 스님을 찾아오게 했다. 그러나 신하들은 스님을 찾지 못하고, 지팡이와 발우만 찾았다고 보고했다. 왕은 남산 비파암에 석가사를 세우고 스님의 자취가 사라진 곳에 불무사를 세워 지팡이와 발우를 나누어 모셨다.

-모량 참사: 죽지랑은 아버지 술종공으로부터 가전 무술을 이어받아 훌륭한 전사로 자랐다. 때문에 화랑도로 전쟁에 참가해 많은 공을 세웠다. 죽지랑이 전쟁에서 공을 세우게 된 것은 법정과 함께 짝이 되어 김유신 장군의 전술에 따라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나라를 몰아내는 매소성전투에서 죽지랑이 위험에 빠졌다. 이때 화랑 득오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했다. 이후 죽지는 득오를 끔찍하게 보살펴 주는 후원자가 되었다.

삼국통일 이후 세력이 커진 모량의 익선이 화랑과 인재들을 포섭하면서 죽지랑의 군사였던 득오를 데려가 가둬 버렸다. 이에 격분한 죽지랑이 화랑들과 함께 모량으로 진격해 싸움을 벌였지만 큰 상처를 입었다. 죽지랑은 상처 입은 몸으로 성으로부터 화랑과 군사적 지원을 받아 다시 공격했다. 익선이 도망가면서 그의 세력은 와해되고, 득오를 구해냈다.

득오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죽지랑이 상처를 입으면서 끝까지 싸움을 지휘한 데 감복해 더욱 충성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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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시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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