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에 세계여행 하기 (9) 말레이시아·③랑카위

랑카위는 99개의 섬으로 이뤄진 군도다.랑카위는 산호 빛 바다와 부드러운 백사장이 펼쳐져있어 ‘보석 같은 섬’이라 불린다.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에서 비행기로 45분 거리에 있다.또 랑카위는 전 지역이 면세 특구로 지정돼있어 많은 여행자들을 설레게 한다.랑카위에서는 세계적인 주류나 담배, 초콜릿 등의 기호품이 부담 없는 면세가로 판매된다.특히 아름다운 랑카위 섬 곳곳에 숨어있는 각양각색의 리조트들을 주목하자.특급 리조트는 저마다 각자의 개성을 뽐내며 세계 각지의 여행객들을 기다리고 있다.여행자들은 입맛에 맞게 인테리어, 서비스, 디자인 등 테마와 콘셉트를 골라 머물 수 있다. ◆랑카위 관광의 묘미, 호핑·보트 투어 우선 전설로 가득한 랑카위의 크고 작은 섬들로 스피드 보트를 타고 떠나는 ‘아일랜드 호핑 투어’는 랑카위 관광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다.특히 아일랜드 호핑 투어 중 즐기는 바다낚시는 가장 추천할 만한 액티비티 중 하나다.랑카위 섬들 사이 물고기들의 입질이 좋은 장소에 보트를 세우고 간단한 바다낚시를 즐길 수 있다.작은 낚시 고리에 미끼를 끼워 바다 속으로 던지면 금세 입질을 느낄 수 있다.낚아 올린 물고기는 근처 섬으로 가져가면 회나 생선 구이로 요리해준다.또 말레이시아 전통 꼬치 요리인 사테를 비롯해 새우, 게, 바닷가재 등 해산물 BBQ를 시원한 맥주 한잔과 함께 맛볼 수 있다.‘킬림 생태 공원(Kilim Geoforest Park)’으로의 보트 투어도 추천한다.킬림 생태 공원은 풍부한 생태계 환경을 간직한 랑카위를 탐험할 수 있다.시원한 킬림 강 사이로 가득한 맹그로브 나무 정글 속에서 서식하는 악어나 게, 원숭이들을 눈 앞에서 관찰할 수 있다.더욱이 강가에 위치한 동굴 속에 잠든 박쥐 무리를 관찰하거나, 랑카위의 상징인 갈색 독수리의 서식지에서 먹이를 잽싸게 낚아 채는 독수리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또 수상가옥으로 이루어진 양어장에서 가오리 먹이를 주는 등 랑카위는 생생한 자연 체험 거리가 무궁무진하다. ◆랑카위의 아름다운 노을 명소 오래 전부터 요트 정박지로 이름난 랑카위의 ‘텔라가 하버 파크(Telaga Harbour Park)’는 다양한 요트들이 정박하는 항구 역할을 한다.마치 지중해 요트 정박지를 연상시키는 이곳은 항구를 따라 이탈리안, 독일, 인도, 러시아까지 다양한 국적의 요리들을 맛볼 수 있는 고급 레스토랑이나 카페, 바들이 줄지어 있다.이곳에서는 수평선 뒤로 지는 노을을 호젓하게 즐기며 저녁식사를 하거나 가볍게 목을 축이기 좋다.텔라가 하버 파크는 은퇴 후 요트 여행을 즐기는 유러피언들이 판타이 체낭 비치(Pantai Cenang Beach)의 낭만적인 노을을 찾아 요트를 정착하는 곳이기도 하다.비록 대부분의 요트가 개인 소유로 관광객이 탈 수는 없다.하지만 이곳에 있는 호텔마다 선셋 크루즈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어 랑카위의 황홀한 석양을 배경으로 둘만의 로맨틱한 호사를 누리는 일은 어렵지 않다.또 ‘판타이 체낭(Pantai Cenang)’은 랑카위 서쪽의 체낭 비치 해변을 따라 형성된 다이닝·나이트 라이프 구역이다.이곳은 전 세계 배낭 여행객들로 가득한 랑카위 최고의 핫 플레이스이다.저렴하고 맛있는 현지 요리부터 신선한 해산물을 맛볼 수 있는 식당이 즐비하다.여행객의 취향과 주머니 사정에 따라 화려한 열대의 밤이 아깝지 않을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선택권을 제공한다.더욱이 판타이 체낭 해변의 해질녘 붉은 노을이 어우러진 모습은 랑카위를 방문한 여행자라면 한번쯤 경험해봐야 할 풍경이다.그러니 칵테일 한잔을 핑계 삼아 둘러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탄중 루(Tanjung Rhu)’ 해변은 랑카위 섬 북동부, 랑카위 공항에서 약 4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해 랑카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특히 해질 무렵 크고 작은 섬들이 저녁노을에 붉게 물드는 풍경은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소나무 숲으로 아늑하게 둘러싸인 해변에는 고급 리조트와 스쿠버 가게 등 최소한의 인공시설만 있어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랑카위의 각양각색 특급 리조트 랑카위 최고급 리조트인 ‘포시즌 랑카위(Four Seasons Langkawi)는 공항에서 차로 약 25분 거리의 랑카위 북동쪽에 위치해 있다.이곳은 랑카위에서도 가장 아름답기로 이름난 탄중 루 비치를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또 유네스코로 지정된 랑카위의 원시 열대 우림으로 둘러싸여 방문객들을 고요하면서도 아늑한 자연의 품으로 인도한다.리조트 전체가 널찍한 독채 형식으로 지어져 둘만의 휴식을 원하는 신혼부부에게는 어느 곳보다 만족스러운 시간을 선사한다.고급스러운 나만의 휴가를 원하는 여행객이나 가족들과의 여유 있는 휴식을 찾는 가족 여행객들에게도 좋다.특히 포시즌 랑카위에 들어서면 입구와 로비를 연결하는 비밀스러운 미로와 같은 통로를 만날 수 있다.이곳은 여행자들을 마치 비밀의 정원으로 향하는 듯 통로 중간 중간마다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모두 4개 유형의 파빌리온과 4개 유형의 빌라로 구성돼있다.객실은 말레이시아 전통 가옥 양식에 인도 및 모로코 스타일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인테리어가 돋보인다.또 ‘메리터스 펠랑기 비치 리조트&스파(Meritus Pelangi Beach Resort&Spa)’도 있다.이곳은 고급 리조트보다 자연 친화적인 환경 속에서 가족들과 다양한 즐길 거리를 만끽할 수 있는 리조트를 찾는 여행객들에게 추천한다.랑카위 국제공항에서 출발해 10분 정도 달리다보면 랑카위에서 가장 긴 체낭 비치를 따라 펼쳐진 광대한 열대 우림과 하얀 백사장으로 둘러싸인 펠랑기 리조트에 도착하게 된다.펠랑기 리조트는 말레이시아 전통 마을을 연상케 하는 51개의 우든 샬레와 350개의 객실을 비롯해 넓은 열대 정원, 수영장, 스파 등을 갖춘 리조트다.객실의 인테리어는 넓은 테라스와 말레이시아 전통 건축 양식이 돋보인다.말레이시아 특유의 매력이 묻어나는 우든 샬레는 화려한 목각 예술이 빛나는 지붕과 넓게 오픈된 테라스, 부드러운 파스텔 톤의 내부 인테리어가 인상적이다.스위트룸이나 메리터스 클럽에 투숙하는 고객들만을 위한 메리터스 클럽 라운지(Meritus Club Lounge)는 아침 식사와 선 셋 칵테일이 매일 무료로 제공된다.이곳에서는 아늑한 바와 라운지, 서재 및 게임 룸 등 다양한 혜택을 즐길 수 있다.또 펠랑기 리조트에서 놓쳐서는 안 될 즐거움 중 하나인 다이닝은 투숙객들에게 특별한 추억을 선사한다.아시아가 보유한 다양한 향신료를 주재료로 한 요리들을 맛볼 수 있는 스파이스 마켓 레스토랑과 맛깔 나는 태국요리를 야외의 탁 트인 공간에서 선보이는 니욤 타이 레스토랑 등이 있다. -자료제공: 말레이시아 관광청구아영 기자 ayoungoo@idaegu.com

8부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 (3) 청도 장연사지

8부..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3)청도 장연사지들녘에는 하루가 다르게 봄기운이 움트고 있지만 지난겨울부터 번진 괴질로 회색빛 하늘까지 침울해 보인다. 어디선가 마음 편안해질 곳을 찾다가 시간의 흔적만 남은 폐사지로 향한다. 세월의 덧없음에 대한 깨달음도 위안을 주는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텅 빈 옛 절터에 서면 헛된 욕심을 하나씩 허물 수 있고 그럴수록 마음은 편안해질 것이다.대구에서 가까운 폐사지 중에는 청도군 매전면에 장연사지(長淵寺址)가 있다. 장연리 장수골 입구에서 육화산을 정면으로 올려다보니 희뿌연 연무가 가득하다. 마을은 완만한 경사가 있는 계곡을 따라 자리하고 있다. 신라 석탑이 있는 장연사지의 존재 등으로 보아 마을 형성은 아주 오래전부터 취락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장수곡(長水谷) 또는 절골로도 불린다. 장연교에서 마을로 들어서면서 왼쪽 계곡 건너편 낮은 구릉에 감나무 밭이 있고 그 가운데 나란히 서있는 두 탑이 보인다. 청도 장연사지에는 절집이 있었겠지만 모든 전각들은 허물어지고 없다. 남아 있는 것이라곤 비바람에 시달려온 석탑과 무너진 석조물만이 천 년 세월을 꿋꿋이 지키고 있다. 지금은 향화와 독경소리가 사라져 적막뿐인 절터는 사색의 공간으로 적합하다. 천 년의 시간을 흘러온 그곳은 산전수전 다 겪은 온화한 할머니처럼 찾는 이를 편안하게 한다. 장연사는 언제 세워지고 언제 사라졌는지 학계에서도 기록을 찾아내지 못해 정확하게 모른다. 다만 지금도 절터에 남아 있는 탑의 양식으로 봐서 통일신라 후기에 존재했던 것이 아닌가 짐작한다.◆천 년의 시간이 남아 있는 곳폐사지 마당에 서 있는 ‘청도 장연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1980년 9월16일 문화재청에 의해 보물 제677호로 지정됐다. 두 탑은 모양과 크기가 거의 같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9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한다. 각각 하나의 돌을 다듬어 만든 몸돌과 지붕돌로 구성된 3층의 탑신은 네 개씩의 우주(隅柱·모퉁이에 세운 돌기둥)와 지붕돌에는 4단씩의 층급받침이 눈에 들어올 뿐 별다른 장식은 없다. 이중기단에 3층의 탑신을 세우고 그 위에 상륜부를 올려놓았다. 전체 높이가 동탑은 4.6m, 서탑은 4.84m로 무난하고 평범한 석탑이다. 주위에 들어선 감나무들과 어울린 분위기 또한 평범하다. 그래서 보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든다. 소박하면서도 단정한 멋을 지닌 불국사 석가탑의 아름다움도 연상된다. 석탑은 종교철학으로 따지면 드높은 정신세계를 알리는 상징이자 엄격함과 고귀함을 지닌다.서탑은 일찍이 무너져 있었는데 개천가에 버려졌던 석재들을 모아서 1980년 2월에 복원했다고 안내판에 적혀있다. 몸돌과 지붕돌 모서리에 크고 작은 손상이 있으며 하층기단은 대부분이 보충한 석재로 이루어졌다. 긴 세월 동안 비바람을 이기고 이끼를 벗하며 처연하게 서 있는 석탑, 오랫동안 동탑만이 외롭게 자리를 지켜왔는데 서탑을 다시 복원하여 나란히 서있게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동탑은 1984년 12월 수리를 위해 해체 복원했다. 당시 1층 몸돌 상단에서 놀랍게도 사리장치가 나타나 관심을 끌었다. 목합(木盒)이 나왔는데 뚜껑에 두 줄의 선이 그어진 것 말고는 아무런 무늬가 없다. 물레를 돌려 표면을 고르게 다듬고 전체에 금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이지만 칠은 거의 벗겨졌다. 내부는 좁고 깊게 파여져 있는데 그 속에서 유리로 만든 녹색 사리병이 발견됐다. 사리합의 높이는 11.8㎝, 사리병은 3㎝이다. 재질이 나무로 만든 사리합은 그 예가 무척 드물다고 하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절터였음을 증언해 주는 각종 석물들은 절터 서편에도 즐비하게 놓여있다. 절의 역사를 말해 주는 석조 문화재들이다. 폐허에 덩그러니 남은 돌덩이들이지만 신라석공의 손을 거친 이후, 천 년 세월이 지났다. 비록 돌이어도 그동안 수많은 이야기들을 속에 품고 있는 것 같아 부드러운 햇살에 눈부시게 빛나 보인다. 폐사지는 볼 것이 별로 없겠지만 그래서 육안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무너지고 깨진 돌조각에서 선조들의 깊은 신앙과 세월의 무상을 함께 느낄 수 있다.청도는 감의 고장이다. 장연사지에서 내려와 하천을 건너면 또 감나무 밭이 있고 그 안에도 당간지주가 서 있다. 이 석물에는 독특한 무늬가 새겨져 있어 특히 눈길을 끈다. 신라시대의 당간지주에 수놓은 무늬가 조선시대의 반닫이나 삼층장의 백통 장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안쪽을 제외한 3면을 곱게 다듬고 바깥쪽에 선명하게 양각했다. 돌에 새겨진 곡선이 대칭적이어서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 다른 당간지주에서는 비슷한 예를 찾기 어려운 점에서 특별한 석조유물이라 할 수 있겠다. 순례객의 발길이 끊어진 빈 절터의 당간 지주가 지닌 이미지는 기다림이다. 이는 사람들이 떠나 버린 동구 밖 느티나무와도 같은 느낌이다. 사실 장연사지의 석물들은 대부분 다른 곳으로 흩어졌다고 추측하고 있다. 탑에서 개울을 건너서 골짜기를 따라 마을 쪽으로 오르면 바로 오른쪽에 사원재(思遠齋)라는 재실이 있다. 그 마당에도 원래 장연사지에 있었다는 사각형의 석조와 또 하나의 당간지주가 잡초 속에 놓여 있다.마을의 고샅길을 잠시 빠져나오면 작은 절집이 나온다. 그 옛날에는 큰절 장연사의 부속암자가 있던 곳으로 추측하는 장소이다. 한눈에 들어오는 도량은 단출하다. 대적광전, 삼성당, 심검당, 요사채가 전부다. 12년 전 세워진 대한불교조계종 장연사(長蓮寺)이다. 현재 이 절에는 두 점의 경상북도 유형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다. ‘장연사소장 묘법연화경’은 유형문화재 제517호인데 1420년(세종2)에 화엄대사 성거(省琚)가 등재본을 필사하고 판각한 판본의 후쇄본이다. 보관상태가 양호하여 조선 초기의 묘법연화경 판본 계통을 연구하는 서지학의 중요한 자료이다. 또 한 점은 유형문화재 제518호인 ‘장연사소장 정선동래선생 박의구해’(精選東萊先生 博議句解)이다. 이 책은 조선 초기에 전래되어 과거시험 준비를 위한 필독서로서 후대까지 꾸준히 열독된 서적이라 한다. 권극중(權克中)의 발문에는 1417년(태종17)의 간행 사실이 언급되어 있는데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책으로서 자료적 가치가 있다고 한다.천 년 전 치열했던 불법의 수행도량이 오늘날에도 다시 살아나기를 기원하는 장연사 주지 월제스님은 “폐사지는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할 수 있으므로 정밀한 지표조사와 관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우리 지역의 폐사지에서는 한국의 불교미술사를 포함하여 역사를 다시 쓸 만한 획기적인 자료의 출현이 언제든 기대된다. 방치되어 있던 폐사지에서 갑자기 국보급 유물이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다. 지자체 단위의 사업에서는 역사자원을 활용한 관광콘텐츠 확충으로 연결된다. 이는 결과적으로 지역사회에도 다방면에서 도움이 될 수 있겠다.◆정밀한 지표조사와 관리 필요돌아가는 길에 다시 장연리 입구 옛 절터로 내려왔다. 감나무 사이를 걸으며 역사적 상상력의 날개를 펴는 것은 천 년 전 신라문화에서만 느끼는 아스라한 정취이다. 통일신라 당시의 가람은 불국사의 절집 배치처럼 거의 쌍탑 일금당식(雙塔 一金堂式)이었다. 장연사지 이곳도 한때는 두 탑이 뜰 가운데 서있고 그 뒤로 금당이 자리 잡은 반듯한 가람으로 우뚝했을 것이다. 절 마당 앞으로 계류가 흐르는 전형적인 가람 배치는 건너편에서 반야용선을 타고 피안의 세계로 건너오는 스토리로 연결된다. 당시 절에서 쌀 씻은 뜨물이 앞 개천을 따라 멀리 있는 동창천까지 뿌옇게 흘러갔다는 내력도 있으니 절의 규모도 짐작된다. 탑돌이를 하기위해 몰려오는 사람들로 사시사철 활기가 넘쳤을 것이다.과거 화려했던 영화와 위엄은 사라지고 없고 쓰러져 버린 절터에서 쓸쓸한 아름다움을 느낀다. 지나온 내력도 사라진 연유도 모른 채 세월 속에 묻혀버리고 그 이름과 몇몇 석물들만을 지상에 남겨놓고 있다. 그래도 보는 눈이 있는 이는 그 빈 공간에서 말없는 깨달음을 발견한다. 석탑 옆 잔디밭에는 연두색 새싹도 보인다. 폐허로부터 받는 뜻밖의 힐링, 삶이 번잡해져 빈 절터를 서성일 때 마음은 홀로 외롭고 홀로 따스하다.(글·사진= 박순국 언론인)--------------------------------------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56) 후백제 견훤 (하) 후백제 멸망

후백제 견훤이 전세가 불리해지자 아들들에게 고려에 투항하자고 권했다. 그러나 아들들은 오히려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고, 맏아들 신검이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견훤은 금산사에서 지키는 병사들에게 술을 먹이고, 병사들이 잠든 틈을 이용해 고려로 도망하여 왕건에게 의탁했다.견훤의 사위가 왕건에게 내부에서 협조할 것을 공모하며 후백제를 공격할 것을 제의했다. 이에 힘입어 왕건은 쉽게 후백제를 점령하고 이어 후삼국을 통일했다.견훤은 아들들을 죽이고자 했지만 왕건이 그들을 용서하는 바람에 화가 치밀어 결국 등창으로 70세 일기로 죽음을 맞았다. 후백제는 견훤이 전주에서 나라를 일으킨 지 47년 만에 파국을 맞았다.◆삼국유사: 후백제 견훤병신년(936) 정월에 견훤이 그의 아들에게 “이 늙은 아비가 신라 말기에 후백제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세워 여러 해가 되었다. 군사는 북쪽 군보다 두 배가 되나 오히려 불리할 뿐이었으니 아마도 하늘이 고려를 위하여 힘을 빌려주는 것 같다. 고려왕에게 귀순해서 목숨을 보전하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그의 아들 신검, 용검, 양검 등 셋은 모두 듣지 않았다.견훤은 처첩이 많아서 아들을 10여 명이나 두었다. 넷째 아들 금강은 키가 크고 지혜가 많아서 견훤이 특별히 그를 사랑하여 왕위를 넘겨주려 하였다. 그의 형 신검, 양검, 용검이 이를 알고 몹시 근심했다.이때 양검이 강주도독이 되고 용검이 무주도독이 되어 신검만 견훤의 옆에 있었다. 이찬 능환이 강주와 무주의 두 주에 사람을 보내 모의하여 청태 2년 을미(935) 봄 3월에 영순 등과 함께 신검에게 권하여 견훤을 금산사 불당에 유폐시키고, 사람을 보내 금강을 살해했다. 신검은 스스로 대왕이라 칭하고 나라 안의 죄수들을 풀어 주었다.견훤이 잠자리에서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멀리 대궐 뜰에서 함성이 들렸다. 이것이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왕께서 연로하시어 나라의 군사업무와 정치에 어두워 맏아들인 신검이 아버지의 왕위를 대신하였다 하여 여러 장수가 축하하는 환호성입니다”고 했다. 얼마 후 아버지를 금산사 불당으로 옮기고 파달 등 장사 30명으로 지키게 했다.견훤은 후궁과 나이 어린 남녀 두 사람과 시비 및 나인 능우남 등과 갇혀 있었다. 4월에 술을 빚어 지키는 군사 30명에게 취하도록 먹였다. 그리고 도망해 고려에 도착하자 견훤이 태조보다 10년이나 연상이라 하여 존칭으로 상부라 하고 남궁에 편안히 살도록 했다.견훤의 사위인 장군 영규는 그의 처에게 “대왕이 40여 년간 노력한 끝에 대업의 성과가 이루어졌는데 하루아침에 가족 간의 불화로 나라를 잃고 고려로 가셨소이다. 고려의 왕공은 인자하고 후덕하며 겸손하고 검소해서 민심을 얻었소. 고려 왕공에게 공손하게 처신하여 뒷날 돌아올 복을 도모합시다” 하니 그의 처가 “당신의 말씀은 바로 저의 뜻입니다”고 했다.이에 936년 2월에 사람을 보내 태조에게 “왕께서 정의의 깃발을 드신다면 청컨데 안에서 호응하여 왕의 군대를 맞이하겠습니다”라고 했다. 태조가 기뻐하며 그의 사자에게 후하게 선물을 주어 보내면서 영규에게 “만약 은혜를 입게 되어 하나로 합세해서 길이 막히지 않게 되면 바로 장군을 먼저 뵌 후에 대청에 올라가 부인에게 절하고, 형님으로 섬기고 받들어 반드시 끝까지 후하게 보답하겠소”라고 했다.6월 견훤이 태조에게 “늙은 이 몸이 전하에게 의탁한 까닭은 전하의 신령스런 위엄을 빌려 반역한 자식을 처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대왕께서 신병을 빌려주시어 적자난신을 섬멸하게 하시면 비록 죽더라도 여한이 없을 것이외다”고 했다.이에 태조가 말하기를 “그들을 토벌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때를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라고 하며 먼저 태자 무와 장군 박술희를 시켜 보병과 기병 10만을 거느리고 천안부로 서둘러 가도록 했다.가을 9월 태조는 3군을 거느리고 천안으로 가서 군사들을 합하여 일선으로 진군하니 신검이 군사들로 대항했다. 갑오일에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는데 태조의 군대는 동북방을 등지고 서남방을 향해 진을 쳤다. 태조는 견훤과 함께 병영을 바라보니 홀연히 검과 창 모양의 흰 구름이 일어나 우리 군대 쪽에서 적진 쪽으로 향하여 갔다. 이에 북을 치며 행군하여 진격하니 백제 장군 효봉, 덕술, 애술, 명길 등이 고려군의 위세가 크고 정연한 것을 바라보고 갑옷을 버리고 진지 앞에 와서 항복했다. 태조가 그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장수가 있는 곳을 물으니 효봉 등이 “총대장인 신검은 중군에 있습니다”고 했다.태조가 장군 공훤 등에게 명하여 삼군이 일시에 협공하여 진격하게 하니 백제 군사가 궤멸하여 패주했다. 황산 탄현에 오니 신검이 두 아우와 장군 부달, 능환 등 40여 명과 함께 와서 항복했다. 태조는 그들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나머지도 모두 그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처자들과 함께 상경할 것을 허락했다.태조가 능환을 문책하여 “처음에 양검 등과 은밀히 모의하여 대왕을 가두고 그의 아들을 왕위에 세운 것은 너의 꾀였으니 신하가 된 의리로 보아 이렇게 할 수 있는가” 하니 능환이 머리를 숙이고 말을 하지 못했다. 마침내 명령하여 그의 목을 베었다. 신검이 참람되게 왕위에 오른 것은 다른 사람의 위협이었지 그의 본심이 아니었고 게다가 항복하여 죄를 빌었으니 특별히 그의 죽음을 면하게 해 주었다. 견훤이 이를 분하게 여겨 등에 종기가 생겨 수일 만에 황산 불사에서 죽었다. 9월8일이며 나이는 70세였다.태조의 군령이 엄격하고 분명하여 군사들이 조금도 범하지 않으니 고을 사람들이 안도하며 늙은이나 젊은이가 모두 만세를 불렀다.견훤은 당나라 경복 원년(892)에 나라를 세워 진나라 천복 원년(936)까지 도합 45년 만인 병신년에 멸망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후백제의 몰락견훤은 신라 사람이다. 그는 타고난 체질이 강건하고 굳세어 전쟁터를 누비는 무장으로 성장했다. 신라 비장으로 승진해 전쟁터를 누볐지만 자신의 꿈에는 미치지 못했다. 전장에서는 성난 호랑이와 같이 지칠 줄 모르고 적을 몰아붙이는 견훤의 용맹스런 기세에 군사들도 저절로 힘을 얻어 연전연승하며 부하들이 그를 따랐다.견훤이 신라에 반기를 든 것은 자신의 상사 때문이었다.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는 그의 무공과 용맹스런 기질에 반해 따르는 군사가 많아지자 이를 시샘한 장군이 논공행상에서 견훤을 의도적으로 배척했다. 견훤은 어느 날 전쟁에서 승리하고 회포를 푸는 축제장에서 노골적으로 인신공격하는 장군의 목을 베어 버리고 따르는 군사들과 함께 신라를 등졌다.더욱이 이날 전쟁터에서 자신을 도와 날랜 모습을 보이던 병사가 남장한 여인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여인은 견훤이 장군의 목을 베어 넘긴 자리에서 평생 자신의 뜻을 따르겠다고 맹세하자 부인으로 삼았다. 여인이 신라에 한을 품은 백제 장군의 딸, 무념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견훤은 고려를 견제하면서 기필코 신라를 멸망시키리라 다짐하고 신라 공략에 치밀한 전략을 세워 기어이 경애왕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견훤이 신라를 치는 과정에서 유독 횡포를 심하게 부렸던 까닭도 그가 아끼는 무념의 복수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그러나 견훤도 오랜 전쟁에 지쳤다. 또 전쟁터에서 만난 그의 다섯째 부인에 대한 사랑에 빠져 궁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군사력도 자연스럽게 느슨해졌다. 아들들의 후계 구도에 대한 경쟁이 심해지면서 군의 기강도 해이해지기 시작했다.또 넷째 아들인 금강을 가장 신임하며 후계자로 삼을 뜻이 있었는데 은연중에 드러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후계구도를 두고 아들들의 경쟁으로 후백제의 운명이 엇갈리는 결과를 빚었다.935년에 견훤의 세 아들이 반역함에 따라 견훤은 태조에게 투항하고, 그의 아들 신검이 왕위에 올랐다. 936년 견훤이 왕건과 함께 손잡고 일선 군에서 싸워 후백제가 멸망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대구·경북 고교총동창회 (12) 안동 경일고

안동시 경일고등학교 교훈은 ‘진실, 능력, 실천’이다경일고는 47년 길지 않은 역사를 가졌지만 우수한 인재를 배출한 사립 명문 고교다. 1972년 개교를 시작으로 경북 북부지역 각지에서 인재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명문고로 자리 잡았다.정치·경제·사회적으로 영향력을 가진 인사들을 그만큼 많이 배출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안동에서 활동하는 주요 인사들이야 더 말할 나위 없다.근래 들어 고등학교가 평준화되기는 했지만 지역 내 공직사회와 전문 직군에서 활동하는 인사들의 출신 고교를 따지면 짧은 역사를 가진 경일고가 타 명문고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최근 들어 국회의원, 도의원, 시의원 등 각종 선출직에서 경일고 출신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이렇듯 수도권과 지역에서 출사표를 던지는 동문이 많은 것도 경일고가 배출한 풍부한 인적자산 때문이다.경일고가 배출한 동량들은 분명 지역 현대사에서 많은 발자취를 남겼다. 그러나 학연이 갖는 폐해 또한 간과할 수 없다.특히 좁은 지역사회에서의 학연은 후배 챙겨 주기와 편 가르기 등의 부작용이 없지 않았다.◆경일고 역사1973년 3월3일 300명의 입학생을 시작으로 개교한 경일고는 안동시 신안동 51번지에 위치한 학교법인 경일학원이다.‘慶一’이라는 교명의 뜻은 경상도에 소재하는 중·고등학교 가운데서 지·덕·체 모든 면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를 양성하는 배움의 터전으로 육성하겠다는 의지를 표방하고 있다.1972년 안동시 신안동 51번지 일대 부지 9천900㎡(3천여 평)를 매입해 학년당 보통과 5학급으로 경일고가 설립됐다. 운암 권태인 선생의 설립 이념은 ‘국가와 민족에 공헌할 인재양성’이다.2011~2012년에는 2년 연속 교육과학기술부에서 발표한 학력 향상도 100대 우수학교로 선정됐다.또 2013년, 2015년에는 경북도교육청의 학력 우수, 학력향상 우수고교로 선정되기도 했다. ◆경일고 총동창회 역사경일고 총동창회는 1976년 창립됐다. 윤종득 동문(1회)이 초대 회장을 맡아 초석을 다졌다.경일고 총동창회는 그간 모교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 왔다. 성적 우수 학생뿐만 아니라 어려운 여건의 학생을 위한 지원도 늘려나가는 등 학교 발전에 힘을 보태고 있다.모교발전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자는데 동문들이 뜻을 같이하면서 ‘경일사랑 기금’ 행사를 통해 장학금, 기숙사, 신입생 유치지원, 불우 이웃돕기 등 다양한 곳에 도움을 주고 있다.학교와 지역사회를 연결하는 가교역할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다. 총동창회가 동문 간 유대를 강화해 모교의 발전을 지원하는 것은 기본 목적이다. 여기에 머물지 않고 지역 발전에 도움이 되는 방안을 적극 개발해 나가겠다는 의지도 다지고 있다.올해 출범한 경일고 17대 총동창회는 최운연 회장(6회), 부회장에 조달흠(6회)·김선동(6회)·강명호(7회)·손호영(9회)·김종웅(11회)·김종칠(12회)·최재홍(15회)·우성호(19회), 사무총장 금영섭(11회), 사무국장 문상필(15회), 감사 권태문(10회)·임영대(12회) 등으로 구성돼 있다.총동창회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지역별 동문 모임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재경동문회 정덕교 회장(6회), 재구동문회 권성원 회장(6회), 재울동문회 이동선 회장(7회), 재포동문회 이상흥 회장(9회), 재구미동문회 이현우 회장(9회), 재부동문회 심진보 회장(1회), 재영주동문회 최종목 회장(4회) 등 지역별 7개 동문회가 활동 중이다.경일고 총동창회는 동문 간 친목과 우의를 다지기 위해 경일산학회, 경일동문골프회, 경상회(경일상공인연합회) 등 동호회별 모임도 하고 있다.이 중 경일산악회는 서울경일산악회와 안동경일산악회가 활동 중이다. 매년 1회 동문체육대회 성공대회를 기원하는 경일인 동문 단합등반대회를 실시하고 있다.골프회 또한 매년 동문들의 친목을 다지기 위해 총동창회장배 골프대회를 안동에서 개최하고 있다.또 매년 동문 체육대회 때 회갑을 맞은 선배 동문을 위해 후배 동문이 회갑잔치를 열어주고 있다. ◆경일고 배출 졸업생졸업생 1만5천여 명을 배출한 경일고는 인재 배출의 요람이다. 지역사회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동문도 많다.김우락(11회) 안동경찰서장, 김시년(5회) 안동시평생학습원장, 김철회(11회) 농협은행 안동시지부장 등 현직에서 활동 중인 지역 내 공무원만 200명에 이른다.특히 지난해 제10대 경일고 교장으로 취임한 김준기 교장은 경일고(7회) 졸업생이다.정계에서는 김성진(5회)·김대일(10회) 경북도의원으로 활동 중이며, 조달흠(6회)·이상근(10회) 동문이 안동시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특히 국회도서관장을 지낸 허용범(8회) 동문은 서울 동대문갑(미래통합당)에 제21대 국회의원 후보로 출사표를 던졌다.법조계에선 김수일(8회) 인천지법 부천지원장이 활동 중이다. 경찰공무원은 김원태(10회), 김상열(10회), 김우락(11회), 김원범(12회), 김병우(13회) 등 5명의 총경을 배출했다.또 교육계에는 안동대학교 문화산업전문대학원에 권기창(5회) 교수, 경북도립대학교 이대형(11회) 교수, 경남도립거창대학 장성수(11회) 교수 등이 있다. 임대식(3회) 동문은 성균관청년유도회 중앙회장을 맡고 있다. 이 밖에 손호영(9회) 동문이 경북축구협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최운연 총동창회장“상생 발전하는 동창회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최운연 경일고 총동창회장은 “우리 동문의 역할 제고는 모교의 미래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미래의 모범이 될 것임을 자부하면서 경일고 동문의 위상을 더욱 신장할 것”을 약속했다.최 회장은 “경일고는 역사가 길지 않다. 전통 있는 다른 학교와는 비교되질 않지만 동문들의 단합력은 타 학교 동문들보다 단결력이 있다고 생각된다”고 강조했다.또 “역사가 짧다 보니 내세울 부분이 적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사회 각계각층에서 동문이 제 목소리를 내고 있다”며 “어떤면에서는 오히려 짧은 역사가 강점이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그는 “전통 있는 학교의 공통적인 고민은 젊은 후배들이 더 이상 동창회를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문들 간의 세대 차이가 너무 심한 탓이다”며 “경일고는 역사는 짧지만 이런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비교적 젊은 세대들이 동창회에 나오고 선후배 사이도 거리감 없이 친근함이 전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최 회장은 무엇보다 동문 간 소통이 활성화 돼야만 모교에 대한 관심도 높아진다고 강조했다.그는 “사이버 공간을 통해서라도 만남이 자주 이뤄져 동문들의 다양한 의견이 모이고 지속적인 정보교류를 통해 총동창회에 대한 이해와 동문 간 소통이 원활해야 만 모교에 대한 관심도 높아진다”고 말했다.최운연 회장은 “모교가 발전하면 지역사회에 우수한 인재가 유입돼 결국은 지역사회도 동반성장하게 된다”며 “모교가 좀 더 우수한 교육기관으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총동창회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아보겠다”고 덧붙였다. 김진욱 기자 wook9090@idaegu.com

소아심부전

경북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권정은 교수 심부전은 심장이 신체가 요구하는 만큼의 박출량을 감당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심부전이 진행하면 부종, 호흡곤란, 성장 부진, 운동 능력 저하 등과 같은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원인소아의 경우 심부전은 심장 또는 심장 이외의 다양한 질환들에 의해 생길 수 있다.원인이 되는 질환들은 성인과 비교할 때 상당한 차이가 있다.성인의 심부전은 심장 근육 자체의 기능 이상에 의해 발생하는 경우가 많지만 소아에서는 선천성 심장병에 동반되는 용적 부하나 압력 부하로 인해 나타나는 심부전이 흔하다.생후 1년 이내에 발생하는 심부전의 가장 흔한 원인은 선천성 심장병이다.심한 용적 과부하가 있으면 심장 근육의 수축력이 정상이어도 심부전이 발생할 수 있다.소아 연령에서 용적 과부하의 가장 흔한 예는 큰 심실중격결손과 같은 많은 양의 좌우 단락을 야기하는 심기형이다.큰 심실중격결손이 있다면 압력이 높은 좌심실에서 압력이 낮은 우심실로 많은 양의 혈류가 결손 부위를 통해 흐르고 이로 인해 심장에 용적 과부하가 발생한다.그 밖에 판막 역류성 병변 또한 용적 부하에 의한 심부전을 일으킬 수 있다.1세 이후에는 심근 질환으로 인한 심부전의 발생 빈도가 증가하는데 심근병증, 심근염, 약물에 의한 심근 손상 등이 구조가 정상인 심장에서의 심부전의 주요 원인이다.심부전의 증상은 연령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영아에서는 수유 곤란이 가장 특징적인 증상이다.또 체중이 잘 늘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때에도 호흡이 빠르며, 식은땀을 흘리기도 한다.나이가 많은 소아 및 청소년에서의 심부전 증상은 성인과 유사하다.운동 시 호흡 곤란, 운동 능력 저하, 피로감, 식욕 부진 등의 증상을 보인다.이러한 증상들은 심기능 장애 및 그에 대한 보상 반응과 관련이 있다.심기능 장애에 대한 보상 반응으로 맥박은 빨라지고 심장의 크기가 커지며, 교감 신경계의 항진으로 인하여 땀이 많이 나고 피부는 차고 습하고 차가워진다.만성적으로 대사 요구량은 증가돼 있으나 칼로리 섭취와 흡수는 잘되지 않기 때문에 성장 장애를 보인다.심부전은 병력, 임상 증상, 신체검사 소견, 흉부 x선 사진 소견, 혈액 검사 소견 등을 종합하여 진단한다.심초음파 검사는 심실 기능의 평가 및 원인 심질환 진단에 큰 도움이 되며 치료 효과의 평가에도 유용하다.혈액 검사 중에서 신경 호르몬계의 활성화를 나타내는 brain natriuretic peptide(BNP), amino terminal(NT)-proBNP는 심부전 정도를 판단하고 치료의 효과를 평가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치료심부전의 치료는 크게 내과적 치료와 외과적 치료로 나눌 수 있다.심부전이 있는 모든 환자는 적절한 내과적 치료를 받아야 하지만 외과적 치료를 통해 원인 질환을 해결할 수 있는 경우에는 교정 수술을 먼저 받아야 한다.내과적 치료에서 약물은 원인 질환과 병태 생리, 체액의 상태, 빠른 맥의 정도, 혈압 등을 전체적으로 고려해 선택해야 한다.이뇨제는 신장에서의 수분 및 나트륨의 재흡수를 억제해 순환 혈액량을 줄여 심장의 부하를 감소시키고 폐, 간, 말초 조직의 부종을 줄여주는 역할을 한다.안지오텐신 전환 효소 억제제, 디곡신, 아드레날린 수용체 작용제, 베타-차단제 등의 약물도 심부전 치료에 사용된다.이러한 약물 치료에도 조절되지 않는 말기 심근증이나, 수술이 불가능한 복잡 선천 심질환 환자들은 심장 이식수술을 받기도 한다.경북대병원은 2017년 급성심근염 이후 만성 심부전을 앓고 있던 8개월 영아와, 2018년 확장성 심근병증과 동반된 급성 심부전을 보인 5세 소아에게 성공적으로 심장이식수술을 시행했다.환아들은 모두 현재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소아는 성인과는 달리 자신의 증상을 말로 잘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영아에서 수유 곤란, 성장 부전, 호흡 곤란을 보이거나 큰 소아에서 운동 시 호흡곤란, 운동 능력 저하, 피로감, 성장 장애 등의 증상이 있다면 반드시 진료를 보고 심장 기능에 대한 평가가 필요하다. 이동률 기자 leedr@idaegu.com

삼국유사 기행(55) 후백제 견훤 (중) 왕건과의 싸움

견훤은 신라 사람이지만 신라에 반기를 들고 후백제를 건국해 스스로 왕이 되었다. 후백제 왕이 된 견훤은 당시 신흥세력으로 떠오른 왕건의 고려와 심각한 대립현상을 보였다.외교적으로는 후백제나 고려도 중국에 사대적인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견훤과 왕건이 서로 전쟁을 하면서 주고받은 편지글에도 사대적인 사상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견훤은 왕건과의 전쟁에서 크게 우세한 힘을 과시했다. 왕건이 팔공산 전투에서는 유명 장수들을 잃고 혼자 옷을 갈아입고 도망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그러나 후백제는 건국 40여년 만에 패망하고 고려 왕건이 삼국을 통일하고 말았다. 견훤은 전쟁에 이겼으나 정치에서 졌다는 사가들의 평가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견훤과 왕건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에 대한 삼국유사의 기록을 요약 소개한다.◆삼국유사: 후백제 견훤왕건은 918년에 수도인 철원의 민심이 변하면서 추대되어 고려 태조로 왕위에 올랐다. 견훤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 축하하면서 공작의 깃털부채와 지리산의 대나무로 만든 화살 등을 선물했다. 견훤은 태조와 상극이었지만 화친하는 체하여 태조에게 푸르고 흰빛이 나는 명마도 선물로 보냈다.925년 10월에 견훤이 3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조물성에 도착하자 태조도 역시 정병을 거느리고 나아가 싸웠으나 승부를 결정하지 못했다. 태조는 작전상 화친해 견훤의 군사를 피로하게 하려고 서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다. 왕건은 4촌 아우인 왕신을 볼모로 보내고, 견훤도 역시 생질인 진호를 인질로 교환했다.12월에 견훤이 거서 등 20여 성을 쳐서 빼앗고 사신을 후당에 보내 변국으로 자처하니 후당이 검교태위 겸 시중 판백제군사의 벼슬을 주고, 도독행전주자사 해동사면도통지휘병마판치등사 백제왕으로 하고 식읍을 2천500호로 했다.견훤은 926년 고려에서 진호가 갑자기 죽자 고의로 죽였다고 의심해 즉시 왕신을 가두고 사람을 시켜 전년에 보냈던 총마를 돌려보내라고 요청하니 태조가 웃으면서 돌려보냈다.927년 9월에 견훤이 근품성을 빼앗아 그 성에 불을 지르자 신라 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태조가 군사를 출발시키려고 할 때에 견훤은 고울부(지금의 울주)를 습격해 빼앗고 시림으로 진격하여 졸지에 신라 서울로 진격했다. 신라 왕과 그의 부인은 포석정에 나가 놀이를 할 때여서 크게 패하였다.태조가 날랜 기병 5천으로써 공산 아래서 견훤을 맞아 크게 싸웠으나 태조의 장수인 김락과 신숭겸이 여기서 죽고, 모든 군사가 패배해 태조도 간신히 죽음을 면하고 도망했다. 견훤이 승리한 여세를 몰아 방향을 돌려 대목성(지금의 약목)과 경산부와 강주를 약탈하고 부곡성을 쳤다.930년에 견훤이 고창군(지금의 안동)을 치려고 군사를 크게 일으켜 석산에서 여러 번 싸웠지만 패하여 시랑 김악이 사로잡혔다. 다음날 견훤이 군사를 수습하여 순주성을 습격해 깨뜨리니 성주 원봉은 성을 버리고 밤에 도망쳤다. 태조가 크게 노하여 그 고을의 격을 떨어뜨려 하지현으로 만들었다.-견훤의 편지신라의 임금과 신하들은 나라가 쇠퇴한 말기가 되어 다시 일어서기 어려우므로 태조를 이끌어 들여 우호를 맺고 후원으로 삼으려 했다. 견훤이 태조가 먼저 들어갈 것을 염려하여 태조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지난번에 신라 재상 김응렴 등이 족하를 신라 서울로 불러들이려 한 것은 작은 자라가 큰 자라의 소리에 호응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종달새가 새매의 날개를 찢으려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나라는 폐허가 될 것이요. 나는 6부 백성에게는 올바른 교화로써 타일렀더니 뜻밖에 간신은 피하여 도망가고 임금이 죽는 변고가 생겼소. 경명왕의 외4촌 아우인 헌강왕의 외손자를 받들어 왕위에 오르게 하니 나라를 다시 세우고 없어진 임금은 모시게 하여 이제야 자리가 잡혔소.족하는 내 충고를 자세히 살피지 않고 단지 유언비어만 듣고 온갖 계책을 다 써서 틈을 노리며 여러 방면으로 침략했으나 내 말의 머리도 보지 못했고 나의 소털 하나도 뽑지 못했소. (중략) 강하고 약한 것이 이와 같으니 이기고 지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오. 내가 바라는 바는 평양의 누각에 활을 걸고 말에게 패강의 물을 먹이는 것이오.그런데 지난달 오월국의 사신이 와서 왕의 조서를 전하기를 “근래 양쪽의 볼모가 죽게 되어 마침내 화친하던 옛날의 우호관계를 버리고 서로 국경을 침범해 싸움이 그치지 않으므로 이제 이 일을 전담하는 사신을 경의 본도로 보내고 또 고려에도 글을 보냈으니 각기 서로 친하게 지내서 영원히 믿고 평화롭게 지내길 바라노라”고 했소.내가 의리로는 왕을 높이 받들고 정리로는 대국을 충실히 섬기는 터에 왕이 타이르는 조칙을 듣고 즉시 공경하게 받들려고 하나 족하가 싸움을 그만둘 수 없는 곤경에 처하여 오히려 싸우려고 하는 것을 염려하오. (중략) 마땅히 미혹하여 거듭 잘못되는 것을 경계해 후회하는 일을 스스로 불러들이는 일이 없도록 하기 바라오.-왕건의 답장927년 정월에 태조는 다음과 같이 답서를 보냈다.삼가 오월국의 사신 반상서가 전한 조서 한 통을 받들고 겸하여 족하가 보낸 긴 사연의 편지도 받아보았소. 오월국의 조서를 받아 비록 감격은 더 했으나 편지를 펴보고 의심스런 마음을 금하기 어려웠소. 금번 돌아가는 사신 편에 하고 싶은 말을 하려 하오.근래에는 삼한이 액운을 만나고 전국에 흉년이 들어 많은 백성이 도적떼가 되고, 논밭은 황폐하게 되지 않은 곳이 없소. 전쟁의 위험을 그치게 하고 나라의 재난을 구하려고 스스로 선린의 우호를 맺었더니 백성들은 농사짓고 누에 치는 일을 즐기고 병사들은 7~8년을 한가롭게 쉬었소.925년이 되자 이해 10월에 갑자기 사건이 생겨 교전하게까지 되었소. 족하가 처음에 적을 가벼이 여겨 바로 진격해 왔으나 이는 마치 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막는 것처럼 하다 마침내 어려움을 알고 용감히 후퇴하였으니 이는 마치 모기가 산을 짊어진 것과 같았소. 그리고 손을 맞잡고 인사를 한 후 하늘을 가리키면서 맹세하기를 “오늘 이후로는 영원히 즐겁게 화목할 것이며 만약에 혹시라도 이 맹세를 어긴다면 신이 죽일 것이다”고 했소.내 또한 창칼을 쓰지 않는 무를 숭상하고 죽이지 않는 어진 것을 추구하여 드디어는 여러 겹 에워싸던 포위를 풀고 피로한 군사들을 쉬게 한 것은 남쪽 사람들에게 큰 은덕을 준 것이었소. (중략) 나의 마음에는 어떠한 악함도 품지 않고 왕실을 받드는 뜻만 간절하여 신라 조정에 도움을 주어 나라의 위기를 구해보려 했소.그런데 족하는 털끝 같은 조그만 이익에 눈이 어두워 천지의 두터운 은혜를 잊어버리고 임금을 목 베어 죽이며 궁궐을 불태우고 대신들을 참혹하게 살해했으며 백성들을 도륙하였소. (중략) 나는 해를 뒷걸음치게 할 만한 깊은 정성과 큰 매가 새매를 쫓는 것을 본받아 개나 말처럼 충성을 다하기로 하여 다시 군사를 일으킨 지 두 해가 지났소. (중략) 하물며 오월왕 전하의 훈계하는 교서를 받았으니 어찌 받들어 행하지 않겠소. 만일 족하도 삼가 명철한 조서를 받들어 흉악한 전쟁을 모두 멈춘다면 오월국의 어진 은혜에 보답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우리 강토의 끊어진 대도 이을 수 있을 것이오. 만약 허물이 있는데도 고칠 수 없다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요.(글은 최치원이 쓴 것이다.)-막바지 전쟁932년에 견훤의 신하 공직이 태조에게 항복하자 견훤은 공직의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붙잡아 다리의 힘줄을 불로 지져서 끊었다. 가을 9월에 견훤은 일길을 시켜 수군으로 고려의 예성강에 침입토록 하여 사흘 동안 머물면서 염주, 백주, 정주 등의 배 100척을 빼앗아 불사르고 돌아갔다 한다.934년에 견훤은 태조가 운주에 주둔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곧바로 정예병사를 선발해 새벽 일찍 밥을 먹여 급습도록 했다. 영루에 닿기도 전에 고려 장군 유금필이 강력한 기병으로 이를 쳐서 3천여 명의 목 베자 웅진 이북의 30여 성이 소문을 듣고 스스로 항복하였다. 견훤의 부하였던 술사 종훈과 의원 지겸, 용장인 상달, 최필 등도 태조에게 항복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대구·경북 고교총동창회 (11) 대륜고등학교 총동창회

‘스스로를 속이지 말자’, ‘남을 사랑하자’. 양심과 사랑을 바탕으로 한 교훈 만큼이나 대륜총동창회는 친목과 교류로 동문간 깊은 사랑과 우정을 나누고 있다. 대륜총동창회는 1952년 대륜동창회 창립총회 윤철균 초대회장 선출을 시작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올해는 내년 개교 100주년을 맞아 동창회기념회관 건립 및 대륜동창회 100년사 출간 준비 등으로 그 어느해 보다 분주한 한해를 보내고 있다. 동문간 친목도모를 위해 매년 대표 행사인 정기총회와 체육대회, 골프대회 등 다양한 행사는 물론 한솔 이효상 선생 시비 제막(1999년), 자랑스런 대륜인상 제정(2010년) 등 모교를 중심으로 한 기념비적인 활동을 주도적으로 펼치고 있다. ◆연중 다양한 행사로 친목 도모 대륜총동창회는 매년 초 정기총회 및 신년교례회로 한 해를 맞이한다.매년 동문 350명가량이 참석하는 정기총회 및 신년교례회는 매년 체육대회 주관 기수와 사무국에서 준비하고 있다. 친선도모와 모교의 발전에 기여하고 긍지를 높이는 한마당 축제로 총동창회 체육대회와 총동창회장배 골프대회도 열린다. 체육대회는 동창회기 입장을 시작으로 전년도와 당해년도 예·결산 보고회, 자랑스러운 대륜인상 수상자 선정, 개교 100주년 기념 사업 추진 계획에 대한 경과보고 및 사업안내에 대한 설명회 등으로 진행된다. 매년 10월 둘째 주 일요일 진행되는 총동창회 체육대회는 청년부와 중년부, 장년부, 황금부로 팀을 나눠 진행된다. 줄다리기와 족구, 탁구, 팀줄넘기,장애물 이어달리기를 비롯해 가요제 및 초대가수 공연, 대륜 디스코왕 선발대회로 펼쳐진다. 총동창회장배 골프대회 외에도 샛별회와 친목도모 골프모임 대륜회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밖에도 재경가족체육대회, 재경동창회장배 골프대회 등 동문회원의 친목 도모를 위한 행사가 열리고 있다. ◆장학사업 등 각종 사업 진행 올해로 6만5천792명의 동문으로 구성된 동창회의 모교 사랑 또한 남다르다. 동문들이 총동창회 장학사업을 통해 과거 학생시절 수혜자였던 이들은 졸업 후 수여자가 되는 선순환의 연속에 동참하고 있는 것. 지난해 기준 1억6천만 원의 장학금을 수여했다. 매년 재경장학회와 함께 재학생 11%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총동창회의 지원을 통해 운영되고 있는 모교 축구부는 그 사랑에 힘입어 지난해 제27회 백록기 전국 고교축구대회에서 최종 우승을 거두기도 했다. 총동창회는 1954년 동창회 장학생 선발 경시대회 장학금 수여를 시작으로 후학 양성을 위한 대륜동창장학회를 이끌고 있다. 2008년 재경장학재단은 장학금 11억 원을 달성했으며, 2013년 재단법인 대륜동창장학회 설립 발기인대회를 갖고 본격적인 활동을 위한 발판을 다졌다. 장학회는 동창회장이 장학회장직을 겸임하도록 하고 장학 사업을 펼치고 있다. 연중 1차례씩 발행되는 ‘샛별문화’와 ‘샛별뉴스’를 통해 동문 소식을 알리는 역할에도 힘을 쏟고 있다. 샛별문화는 개교 기념일을 맞아 10월 중 2천500부 정도 발행이 된다. 샛별문화에는 샛별갤러리, 샛별문예, 동창회 소식, 주관기수 소식, 모교 소식 등이 실린다. 매년 6월 말께에는 전년도 10월에서 5월까지 소식을 다룬 샛별뉴스 1천400부도 발행된다. 샛별뉴스에는 100년을 앞둔 대륜사 바로알기 시리즈, 동문이야기, 동문 동정, 모교소식, 동창회비 납부현황 등이 게재돼 있다. 대륜총동창회 산하에는 성서샛별회, 강북샛별회, 북대구샛별회 등 지역동창회와 함께 42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골프동호회 샛별회를 비롯한 대륜회, 재경샛별회, 재경대륜회가 매월 열리고 있다. 또 총무단, 체륜회, 언륜회, 문학회 등 동호회별, 지역별로 동문들이 끈끈한 유대를 형성해 나가고 있다. 대륜총동창회는 동문들과의 활발한 소통을 및 각종 다양한 행사의 참여를 독려하고자 모바일 어플리케이션을 개발, 운영하고 있다. 모바일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공지사항, 동문동정 등 동창회 소식과 각종 행사 사진, 회비 납부 현황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어플리케이션은 광고 및 홍보의 장으로도 활용되며 각 지역 홈페이지, 카페, 밴드 등과도 연동돼 있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대륜동문 고충 상담위원회도 운영 중이다. 공인회계사, 변호사, 세무사, 노무사 동문을 선별, 고충 상담을 진행하고 있다. ◆100주년 기념관 건립 및 대륜동창회 100년사 출간 2021년 개교 100주년이 되는 해를 맞아 총동창회는 대륜동창회 100년사 출간(가칭)과 함께 동창회관을 마련할 계획이다. 총동창회는 100주년 기념사업의 핵심을 모교와 후배들을 위한 100주년 기념관 건립에 두고 있다. 100년 전통을 이어오는 대륜의 혼을 후학들이 학습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하고, 차세대를 살아갈 미래 인재양성을 위한 대륜만이 갖는 특별한 배움과 체험의 현장을 제공한다는 취지에서다. 대륜의 정신을 보여주고 미래의 청사진을 제공하는 대륜역사관과 모교를 위해 헌신하고 학교의 명예를 드높인 선배들의 업적을 기리는 대륜 명예의 전당 등이 설치될 예정이다. 또 100주년 추진위원회와 서울에 있는 재경 대륜동창회가 공동으로 이달 말까지 대구의 은혜에 보답하고 시민들과 함께 한다는 의미로 코로나19 성금 모금 운동도 펼친다. 대륜동창회 100년사 편찬 작업은 대구지역 대륜 동문 언론인 친목 모임 언륜회가 맡는다. 대륜 총동창회는 대륜의 동문동창이 만드는 최초의 독립된 역사서라는 점에 큰 의의를 두고 있다. 대륜동창회 100년사 발간 사업은 지난해 6월부터 2021년 9월까지 총 28개월에 걸쳐 진행 중이다. 1억여 원을 들여 제작, A4용지 크기 600쪽 컬러 인쇄로 2천 부 발간될 예정이다. 대륜동창회 100년사는 동창회 역사와 대륜의 일상, 대륜의 인물, 대륜의 비전 등으로 구성된다. 우선 동창회 창립 및 동창회 활동과 동창회사업, 체육대회 개최, 역대 동창회 임원 등을 소개한다. 기수별, 지역별, 직업별, 동호회별, 기타 서클 등의 연혁 및 주요 활동도 실린다. 기수별 지도교사, 교사가 본 ‘대륜과 나’, 외부에서 본 대륜동창, 언론보도 대륜, 동창회 연보 등도 소개될 예정이다. 총동창회는 100년사 출간을 위해 사진, 일기, 그림, 문서, 증언 등 유·무형의 자료도 모집 중이다.------------------------------------------------------------------------------------------◆총동창회장 인터뷰“선배는 사랑으로, 후배는 존경으로 서로 화합하고 우애를 다지며 의지가 되고 동반성장하는 총동창회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올해 초 대륜총동창회 제17대 회장으로 취임한 배인호 회장은 취임소감으로 이같이 말했다. 배 회장은 “대륜은 대구지역 계몽운동의 요람지로 지사 양성소였던 우현서루에 이어 민족학교 교남학원을 모태로 한 학교로, 99년을 이어와 100년을 앞두고 있다. 대구시민과 함께 해 온 역사와 정신을 빼놓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총동창회의 부흥과 발전을 위해 가장 중요한 점으로 미래를 준비하는 미래 지향적 사고를 근본으로 동문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꼽았다. 배 회장은 “선배와 후배가 세대를 이어가는 연속성을 바탕으로 젊은 신임 동창의 입장에서 접근하고, 진입이 쉽고 친근하게 함께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전했다. 또 “총동창회 내 다양한 소모임 활동을 통해 동문간 유대 강화와 협력이 이뤄질 수 있도록 총동창회가 앞장서야 한다”고 했다. 자랑스런 동문 또는 기수를 소개해달라는 질문에 그는 민족저항 시인 이육사 및 월남전에서 적의 수류탄을 자신의 몸으로 덮쳐 산화함으로써 부하들을 구해낸 의인 이인호 소령, 총동창회장을 역임한 이만섭 전 국회의장, 김영준 전 감사원장 등 가슴깊이 남는 선배들을 꼽았다. 이어 “선배기수부터 사랑하는 막내 기수까지 한결같다. 동참회 참여하는 모든 기수, 동문이 최선을 다하고 있기에 모든 동문이 자랑스럽다. 총동창회를 중심으로 동문 모두가 적극적으로 참여해 지역사회에 필요한 대륜의 동문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8부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 (2) 구미 척화비와 인동의 문화재

구미 척화비와 인동의 문화재코로나19 바이러스는 대한민국 산업화의 요람도 비켜가지 않았다. 코로나19가 창궐하면서 확진자가 늘어나고 있는 기간 구미공단 지역은 외지인의 방문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다.경북 북부 안동과 상주를 거치면서 기세를 얻은 낙동강은 구미들을 가로지르며 한층 도도해진다. 그 낙동강은 경상도의 젖줄이 되었고 구미를 한국 산업화의 기지로 만들었다. 구미에서 낙동강은 남북으로 흐르며 기존 시가지, 구미1공단과 인동, 구미2·3공단을 나눈다. 구미1공단에서 낙동대교를 건너면 2공단과 3공단, 구미공단 지킴이 인동(仁同)이 있다. 이 가운데 척화비는 눈에 띈다.구미 척화비는 구미3공단에서 구미 산동 해평 방면으로 넘어가는 석현 고갯길을 넘어가다 길가에 서 있으며 150년 전 조선인의 결기가 그대로 서려 있다.내용은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서양 오랑캐가 침략해 온다.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밖에 없다. 화해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자손만대에 이를 경고한다. 병인년 짓고 신미년 세운다.) 뒤로 갈수록 글자가 희미해져 읽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다른 곳에 남아 있는 척화비와 문헌을 통해 글자를 해독한 것이다.조선말 아들을 왕으로 세우고 실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국내정치에 외치를 이용하기 위해 병인양요 이후 강력한 쇄국정책을 편다. 대원군이 1866년 조선인 천주교 신자 수천명과 프랑스인 신부 9명을 학살하자 프랑스가 자국 신부의 학살을 핑계로 군함을 이끌고 조선을 침범, 개항을 요구한 것이 병인양요다. 5년 뒤 1871년 미국 아시아함대 로저스 사령관이 군함 5척을 앞세우고 조선과의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도로 진격해 온 것이 신미양요다.조선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프랑스와 미국은 조선 개항이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대원군은 나라 문을 더욱 굳게 닫았다. 그리고 전국에 서양 오랑캐를 막아내자는 굳은 결의를 비석으로 새겨 남겼다. 기록에 따르면 서울의 종로 네거리와 부산 동래, 경주 등 도시에서 충청 전라도의 산골까지 전국 곳곳에 무려 200여 기의 척화비를 세웠다. 그 내용은 같았고 시기도 같았다. 그러나 1882년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실각하면서 땅 속에 파묻히거나 바다에 빠뜨려지기도 했고 부서지기도 했다. 지금 포항 장기면사무소나 청도, 부산 용두산공원 등에 33기가 남아 있는데 자연석 화강암 척화비는 이곳뿐이다.구미 구포동의 척화비도 당시 한 석공이 조상의 묘지 상석을 만들려고 다듬다가 지역민들의 저지로 살아남아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최근에야 이곳 길가에 자리를 잡고 이젠 경북도 문화재자료 22호로 지위까지 얻어 기억을 살릴 수 있게 됐다.구미1공단에서 낙동대교를 건너자마자 왼쪽, 강의 동쪽 야산에 동락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낙동강 동쪽인 이곳은 칠곡군 인동면이었고 그 인동이 낳은 조선명유 장현광을 모신 사원이 동락서원이다. 동락(東洛)은 동방의 이락(伊洛)이니 송나라 학자 정호 정이 형제가 수학하던 이수(伊水)와 낙수(洛水)를 말한다.동락서원은 옆에 있는 한옥 부지암정사(不知巖精舍)를 그 모태로 한다. 여헌 장현광 선생이 57세 되던 1610년 제자 장경우 선생이 낙동강변 동남쪽 언덕에 정자를 지었다. 장현광 선생이 직접 부지암정사라 이름하고 만년을 이곳에서 강학하며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정사는 선생이 돌아가신 17년 뒤인 1654년 서원의 체제를 갖추고 이듬해 서원으로 개칭, 장현광 선생의 위패를 봉안했다. 1676년 숙종때 동락서원이란 사액서원으로 승격됐으나 대원군때 철폐됐다. 1904년 영당을 새로 건립하고 1932년 지역 유림들의 뜻을 모아 사당을, 1971년 부속건물까지 복구해서 중창하고 장현광 선생과 장경우 선생을 배향했다.외삼문인 준도문을 들어서면 윤회재와 근집재가 동서쪽에 자리하고 경북도 문화재자료 21호인 중정당 뒤로 사당인 경덕묘가 있다. 중정당 서쪽 처마와 붙어있는 신도비는 미수 허목 선생이 지은 신도비가 자리잡고 있다.부지암정사에 동락서원이 들어서자 후손들은 당초 부지암정사 창건 뜻을 살리기 위해 1885년 정사를 건립했다. 그러나 구미공단이 들어서고 구미대교가 놓이면서 1975년 서원 옆 지금의 자리에 다시 지었다. 장현광 선생은 서원 옆 낙동강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소가 있어 그 심오함에 흠뻑 빠졌었다고 오홍석 구미시 문화계장은 말한다. 그 깊이는 성리학의 깊이나 인간의 깊이와 같이 깊고 나의 마음과 같이 알 수 없는 깊이라며 부지에 대해 의미를 더했다.서원 앞 400년도 더 된 보호수 은행나무는 여헌 선생이 직접 심었다고 하는데 암수 딴 그루인데도 해마다 엄청난 은행을 맺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기도처로도 유명해졌다. 후손 장세곤씨는 은행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금줄을 쳐보기도 했지만 찾는 사람들의 정성을 막지는 못한다고 하소연이다.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장현광 선생은 20세에 벌써 학문이 완숙 단계에 들어섰을 만큼 일생을 인간과 자연, 우주를 아우르는 학문과 저술에 바친 조선 성리학의 대가이다. 7세에 부친으로부터 글자를 배우면서 글귀를 만들었고 8세에 부친이 돌아가신 뒤 자형 노수함에게 글을 배웠다. 18세에 공부한 것을 종합 포괄하여 앞으로 학문할 계획을 수립했으니 바로 ‘우주요괄’ 10첩이 그것이다.향시에 두 차례 합격했으나 대과에는 나가지 않았고 벼슬도 대부분 사양했다. 조정은 그의 학식과 덕망을 높이 사 잇따라 벼슬을 내렸으나 그는 대부분 병을 핑계로 부임하지 않았다. 여헌학연구회의 자료에 따르면 선생에게는 37차례의 관직 제수가 있었으나 출사한 것은 외직 두 번과 내직 세 번이 전부였다. 선조는 38세의 선생에게 전옥서 참봉을 내렸으나 모친상 중이어서 부임하지 않았으니 처음 관직은 42살 때 보은현감(종6품)이었다. 그것도 6개월만에 병을 핑계로 그만뒀다.보은현감으로 나갈 당시 선생이 밝힌 출처(出處)는 지금 세상의 관리들에게도 경계로 삼을 만하다. “벼슬에 나아갈 만한 의리가 없으면 벼슬하지 말 것이니, 학문이 넉넉하지 않고, 시기가 적당하지 않고, 예로서 대접하지 않으면 집에서 가만히 있는 것이 옳다.” 단호한 선비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냈다.선생의 방대하고 심오한 학문은 유학과 제자백가의 학설은 물론 이단시하던 노자와 불교 사상까지도 비평과 수용의 대상으로 삼았다. 우주 자연인으로 일생을 살았고 자신의 호처럼 전국을 떠돌며 나그네처럼 살았으니 그 바탕을 도(道)에 두고 있으니 인조가 내린 선생의 제문에 “500년에 한 번씩 태어나는 우리나라의 위대한 인물”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생전 두 번의 대사헌을 제수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고 84세에 인조의 남한산성 굴욕 소식을 듣고는 분개하여 동해안 입암산에 들어간 지 반년 만에 돌아가셨다. 돌아가신 지 20년 뒤인 1657년 효종 때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강(文康)의 시호를 받았으니 선생의 인품과 충절을 공인받은 것이다.마애여래불(摩崖如來佛)인동 구미3공단에서 선산으로 넘어가는 고개 오른쪽의 척화비를 가기 전에 맞은 편 산등성이에 높이 7.2m, 어깨폭 2.8m의 거대한 바위를 깎아 빚은 마애불(보물 제 1122호)이 풍상을 겪고 마모돼 가고 있다. 지금 문화재청이 안전 검사를 하고 있다는데 앞쪽은 멀쩡해 보여도 옆모습을 보면 바위의 균열이 심해 곧 부셔져 무너질 듯 위태롭기 짝이 없다. 구미공단이 들어서서 한국 산업화를 이룬 주역으로 성장해오는 동안 마애불이 지켜보고 또 지켜준 덕이었다면 오늘날 구미공단의 위기는 마애불의 위기에서 오는 것인가 턱없는 상상도 하게 만든다.초승달 모양의 눈썹과 굳게 다문 작은 입술, 평평한 코와 어깨까지 늘어진 귀의 모습은 무심한 듯 근엄하고 자상한 속을 짐작케 한다. 옷을 걸쳤으니 그 선이 팽팽한 속살을 비치듯 얇아 바람에 날리는 듯하고 두 다리는 연화대에 얹었는데 풍만하게 보인다.안내문에는 백제군에 쫓기던 당나라 장수가 한 여인의 도움으로 이 바위 뒤에 숨어 목숨을 구한 뒤 그 고마움을 표시하고자 불상을 새겼다고 적혀 있다. 그렇다면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불상 같은데 머리 위에 얹힌 판석은 고려시대 마애불상의 전형적 모습이라고 한다. 불상이 바라보고 있는 곳은 동쪽 구미3공단 너머 천생산이다. 그러나 세월의 변화를 마애불도 이겨내지 못했음인지 옛날 산속이었을 마애불 앞은 공장들이 틀어막고 또 길이 나면서 마애불도 제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공단 주변환경과 차량 진동 등 산업화의 현장이 신비롭고 경이로운 문화재를 훼손시키고 있다는 안타까움도 있다.1천년을 지켜오던 마애불이 문화재청의 프라스틱 보호 시설 설치 이후 습기와 진동에 균열이 심해지고 있다는 지적도 있고 보면 빠른 진단 결과가 나와서 안전하게 보호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구미공단도 다시 활기를 되찾았으면 좋겠다.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한눈에 세계여행 하기 (8) 말레이시아·②코타키나발루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는 동 말레이시아 보르네오 섬 북동쪽에 위치한 사바(Sabah)주의 주도다.남지나 해협과 접해있는 해양도시로 보르네오 섬의 때 묻지 않은 자연의 신비로 가득한 ‘바람 아래의 땅’이라 불린다.산, 강, 바다 등 다채로운 자연이 함께하는 꿈의 휴양지로 무더운 열대 기후 속에서도 쾌적한 환경을 갖추고 있어 편안한 휴식을 위한 가족 여행지로 안성맞춤인 곳이다.특히 산과 바다와 함께 어우러진 최고급 휴양 리조트들은 코타키나발루를 찾는 가족 여행객들에게 안락함과 편안함을 제공한다. ◆원주민 삶 체험, 마리 마리 민속촌 마리 마리 민속촌(Mari Mari Cultural Village)은 사바에 거주하는 대표적인 원주민 5개 부족의 전통 의식주를 체험하는 일종의 민속촌이다.5개 부족은 바자우·룬다예·무룻·룽구스·두순.독특한 점은 실제 원주민들의 주거 형태를 사실적으로 재현하고자 이들의 터전을 도심에서 30여 분쯤 떨어진 숲 속에 조성했다는 점이다.계곡과 숲을 오가며 5개 부족의 전통 가옥과 부족의 삶을 체험할 수 있어 매우 생생한 민속촌으로 평가받고 있다.이곳 가옥은 롱 하우스라 부르는 말레이 전통 가옥으로 형성돼있다.재밌는 점은 부족에 따라 조금씩 다른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원주민들은 실제로 이곳에 살지는 않지만 전통을 공유한다.또 다양한 시연을 통해 여행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여행객들은 전통 음식 만들기(팔뚝 길이 정도로 자른 대나무 통에 여러 재료를 넣고 화덕에 통째로 넣어 익히는 요리), 블로우 파이프(기다란 관에 독침 등을 넣어 사냥이나 전쟁을 벌이던 전통 무기) 체험, 전통 방식에 따른 대나무 불 피우기, 널찍하게 짠 대나무 발판에서 뛰는 전통 트램펄린, 전통주 시음 등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다.오전 10시, 오후 2시와 6시 등 하루 세 번의 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 키나발루 산 키나발루 국립공원(Kinabalu National Park)은 코타키나발루의 자랑거리다.코타키나발루가 여느 열대의 휴양지들과 분명히 구분되는 점은 동남아시아 최고봉으로 알려진 해발고도 4천101m의 키나발루 산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1964년 국립공원으로 조성된 키나발루 산은 2000년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말레이시아 최초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될 정도로 세계적인 동식물의 보고로 유명하다.키나발루 산의 낮은 지대는 열대 지역으로 저지다 우림을 이루고 있으며, 중간 지대는 저산대 참나무와 무화과나무, 철쭉나무 등의 온대 지역 나무들로 가득 차 있다.키나발루 산의 고지대는 산 정상을 중심으로 침엽수와 고산식물들을 볼 수 있다.시내에서 차량으로 2시간 거리에 위치해 있는 키나발루 산은 가벼운 일일 트레킹부터 1박2일 또는 2박3일까지 여러 일정으로 오를 수 있다.다만 정상까지 오르려면 산속 숙소와 가이드, 포터를 예약하는 등 준비가 필요하다.키나발루 산 등정의 백미는 빼곡한 열대우림 속에서 만나는 자연이다.고도에 따라 다양한 생물이 살고 있어 꽃잎 한 장의 폭이 2~3m나 되는 세계에서 가장 큰 꽃 ‘라플레시아’를 비롯해 독특한 동식물과 만날 수 있다.제법 쌀쌀한 고지대 밀림 속이라 색다른 묘미가 있는 포링 온천은 산 중턱에 있어 1일 트레킹 코스로도 이용 가능하다.산장에서 하루를 묵고 새벽에 정상에 오르면 멀리 보이는 남지나해의 일출도 장관이다. ◆아름다운 해변을 가진 다섯 개의 낭만가득한 섬 코타키나발루에는 마누칸(Manukan), 마무틱(Mamutik), 술룩(Sulug), 가야(Gaya), 사피(Sapi) 5개 섬이 있다.5개 섬 모두의 백사장이 아름다워 해변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조용히 산책하며 여유를 즐기는 관광객들로 붐빈다.우선 가야 섬(Gaya Island)은 해양국립공원 내 다섯 섬 중에서 가장 큰 섬이다.코타키나발루 시내에서 약 20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가야 섬은 사람들의 손길이 아직 많이 미치지 않은 곳이기 때문에 섬 안의 밀림 속에서 갖가지 동식물들이 서식하고 있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섬의 앞쪽에는 자유로이 형성된 수상가옥에서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고, 북쪽에는 잘 가꾸어진 가야나 에코 리조트(Gayana Eco Resort)가 자리 잡고 있다.또 사피 섬(Sapi Island)은 가야 섬 바로 옆에 위치한 섬으로, 일반 관광객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말레이시아어로 사피는 ‘소’ 라는 뜻을 갖고 있다.가야 섬과 사피 섬 사이 불어오는 바람이 두 개의 섬 암벽에 부딪혀 마치 소 울음소리가 난다해 사피 섬이라 칭했다고 한다.선착장을 중심으로 한쪽은 열대어와 산호초가 자연 그대로 보존돼 있어 간단한 스노클링만으로 아름다운 바다의 신비를 만끽할 수 있다.다른 한쪽은 청정 해역에 금빛 모래로 형성된 넓은 백사장으로 수영하고 놀기에 적당하다.특히 사피 섬에 자연적으로 서식하는 원숭이들은 이곳을 찾는 여행객들에게 또 다른 즐거움을 제공한다.모험을 즐기는 사람들을 위한 정글 트레킹 코스도 있어 산림욕과 같은 색다른 체험을 느낄 수 있다.마누칸 섬(Manukan Island)은 섬의 모양이 남지나 해협에 서식하는 마누칸이라는 고기와 같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숙박시설과 갖가지 유락 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세계 각국의 여행객에게 잘 알려진 섬이다.넓게 펼쳐진 백사장과 수정처럼 맑은 청정 해역에서 간단한 스노클링만으로 열대어와 만날 수 있으며 수심이 얕은 해안선까지 잘 보존된 산호초는 아름다움의 극치로 평가 받는다.마무틱 섬(Pulau Mamutik)은 툰구 압둘 라만 해양공원에서 가장 규모가 작은 섬이고, 비교적 덜 알려진 곳이다.하지만 바다 빛깔이 이 지역 으뜸으로 손꼽힌다. 스노클링이나 스쿠버 다이빙 등으로 바다를 체험하기 좋다.단체 여행객을 피하고 싶은 유럽인들이 주로 이곳을 찾아 힐링한다.편의시설이 부족한 것이 조금은 불편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자연 그대로를 간직하는 장점이 있다.술룩섬은 마무틱 섬과 마누칸 섬 뒤에 있는 작은 섬이다. ◆스릴 가득한 래프팅 즐길 키울루, 클리아스 강 키울루 강(Kiulu River)은 래프팅을 즐기기 좋은 곳으로 뛰어난 경치가 일품이다.이곳은 적당한 스릴과 빼어난 경치를 즐기기 좋은 곳이다.키울루 강 래프팅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풀코스는 15㎞에 이른다.하지만 물살이 상당히 거친 구간을 포함하고 있는 탓에 초보자들은 대부분 7㎞ 하프코스를 즐긴다.또 클리아스 강(Klias River)도 있다.이 강은 맹그로브 숲으로 뒤덮인 습지에 자리하고 있다.코타키나발루 시내에서 차로 2시간 거리에 있다.강 주변은 기묘한 생김새의 코주부 원숭이를 비롯해 악어, 도마뱀, 트리 스네이크와 새 등 다양한 야생 동물을 만날 수 있어 최근 사바 주를 대표하는 에코 투어로 각광받고 있다.대부분 보트를 타고 클리아스 강을 따라가며 즐기는 클리아스 습지 크루즈 투어는 ‘반딧불이 투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해가 지면 수백 마리의 반딧불이가 날아올라 아름다운 불빛의 향연을 펼쳐 보이기 때문이다.클리아스 강 투어 프로그램은 대부분 오후 2~3시경 시내에서 출발해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오는 일정으로 진행된다.투어에는 시내와 클리아스 습지 간 차량과 크루즈 보트, 음료, 저녁식사가 포함돼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낼 수 있다.-자료제공: 말레이시아 관광청구아영 기자 ayoungoo@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54) 후백제 견훤 (상) 후백제 건국

상주에서 태어난 견훤은 신라 사람이었다. 삼국유사는 그를 진흥왕의 후손으로 기록하고 있다. 신라 진성여왕 때 장군으로 활약하다가 전주 지방에서 추종자를 모아 궁궐을 짓고 후백제를 건국하면서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고려 왕건을 압박하는 한편 신라의 성을 공격해 영토를 넓혀 후삼국의 구도를 형성하면서 강력한 나라로 성장했다. 그러나 반세기에도 못 미치는 시간에 후백제는 고려에 항복하면서 후삼국통일의 희생양으로 전락하며 멸망했다.삼국유사는 후백제 견훤을 길게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일연은 견훤을 뛰어난 인물이라 소개하고 있지만 지렁이 아들로 은근히 비하하며 상대적으로 고려 왕건을 훌륭한 인물로 추켜세우고 있다. 후백제 역사는 견훤의 일대기로 기록된다. 후백제 건국, 고려와의 전쟁, 후백제 멸망 세 단락으로 나누어 후백제 견훤을 알아본다.◆삼국유사: 후백제 견훤견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으로 867년에 태어났다. 본래 성은 이씨였으나 후에 견을 성씨로 삼았다. 아버지 아자개는 농사를 지어 생활하다가 885~887년에 사불성(지금의 상주)에 웅거하여 스스로 장군이라 칭했다. 아들은 넷으로 모두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는데 견훤은 지혜와 책략이 많아서 출중하게 뛰어났다.이제가기 기록에는 진흥대왕의 비 사도의 시호는 백숭부인데 그녀의 셋째 아들은 구륜공이고, 구륜공의 아들은 파진간 선품이다. 선품의 아들 각간 작진의 처 왕교파리가 각간 원선을 낳으니 이 사람이 아자개다.아자개의 첫째 부인은 상원부인이고 둘째 부인이 남원부인이다. 아들 다섯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그 맏아들이 상부 견훤이다.또 고기에 이런 기록이 있다. 옛날에 광주 북촌에 사는 한 부자가 딸 하나를 두었는데 태도와 용모가 단정했다. 딸이 아버지에게 “자줏빛 옷을 입은 남자가 밤마다 저의 침실에 와서 관계를 합니다” 하니 아버지가 “너는 긴 실을 바늘에 꿰어 남자의 옷에 꽂아 두어라”고 했다.딸이 그 말대로 했다. 날이 밝자 실은 북쪽 담장 아래에서 찾았는데 바늘은 큰 지렁이 허리에 꽂혀 있었다. 이로 인하여 그 후 임신하게 되어 사내아이를 낳았다. 아이 나이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이라고 일컬었다.처음에 견훤이 태어나 젖먹이로서 강보에 있을 때에 아버지는 들에서 밭을 갈고 어머니는 밥을 나르면서 어린아이를 숲 속에 뉘어 놓았더니 호랑이가 와서 그에게 젖을 먹였다.아이가 장성하자 체격과 용모가 웅장하고 기이했으며 뜻과 기품이 활달하고 비범했다. 군인이 되어 서울에 들어왔다가 서남쪽에 가서 바다를 지킬 때는 창을 베고 적을 기다렸다. 그 기개가 항상 군사들의 앞장이 되니 그 공로로 비장이 되었다.당나라 소종 경복 원년(892) 신라 진성왕 6년에 총애받은 신하가 왕의 곁에 있으면서 은밀하게 국권을 농간하니 기강이 문란하고 해이해졌다. 거기에 기근이 더해 백성들은 떠돌아다니고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이에 견훤이 반역할 마음을 품고 무리를 모아 서울의 서남쪽에 있는 주와 현을 공격하자 가는 곳마다 호응해서 한 달 만에 무리가 5천이나 되었다. 마침내 무진주를 습격하여 스스로 왕으로 자처했다.견훤은 서쪽으로 순행해 완산주에 도착하자 그 주의 백성들이 환영하며 위로했다. 인심을 얻은 것이 기뻐서 견훤은 “백제가 나라를 세운 지 600여년에 당나라 고종이 신라의 요청으로 장군 소정방을 보내서 수군 13만 명이 바다를 건너고, 신라 김유신이 휩쓸어 황산을 넘어 당나라 군사와 합세해 백제를 쳐서 멸망시켰다. 도읍을 세워 묵은 원한을 풀겠다”면서 스스로 후백제 왕이라 칭하고 관직을 설치해 직책을 나누었다. 이때가 당나라 광화 3년이며 신라 효공왕 4년이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후백제 견훤견훤은 상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아자개가 들에서 일하다가 점심을 먹고 잠깐 졸았는데 마당 우물에서 호랑이 한 마리가 뛰쳐나오더니 몸이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크기로 자라면서 지붕 위로 훌쩍 뛰어올라가 하늘을 향해 천둥소리처럼 포효했다. 깜짝 놀라 일어났는데 부인도 같은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이어 태기가 있더니 낳은 아이가 견훤이다. 아자개의 첫 번째 아들이다.견훤은 어릴 때부터 재치가 뛰어나고 체격이 크며 힘이 장사였다. 나이 열여덟에 무과에 급제해 전쟁터를 누비기 시작했다. 전쟁터에서는 장군의 공격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적진으로 뛰어들어 맹수같이 휘저어 아군의 병사들은 크게 다치는 일도 없이 쉽게 승리하곤 했다.견훤은 뛰어난 전술과 무술 실력을 인정받아 그의 나이 스물다섯에 비장이 되었다. 진성여왕이 즉위하고 곧 나라가 어지러워지면서 곳곳에서 도적이 들끓기 시작했다. 삼년을 연이어 흉년이 들고, 매관매직으로 부패한 관리들이 설치면서 백성들의 원망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견훤이 비장이 된 이후 명령을 받은 일은 줄곧 도적을 소탕하라는 일이었다. 도적을 잡는 일은 여반장이었다. 그러나 견훤은 비장의 일에 조금씩 흥미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그 도적들이 전문적인 군사도 아니고, 대부분이 먹을 것이 없어 폭정을 피해 달아난 백성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견훤이 전주에서 민심을 교란시키며 백성들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폭정을 일삼는 현령을 숙청하고, 임시 현령의 직을 맡아 보살피던 어느 날 꿈을 꾸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강물이 점점 끓어오르더니 배가 녹아 없어지고 자신의 몸이 용이 되어 전주성으로 날아올랐다. 이어 거대한 이무기 두 마리를 잡아먹고는 아홉 개의 알을 낳았는데 모두 용으로 바뀌어 서로 싸우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모조리 집어삼켰다. 그러자 전주성이 폭삭 내려앉더니 사방으로 불길이 번져나갔다.견훤이 같은 꿈을 사흘 연속해서 꾸었다. 심상치 않아 용하다는 점술가를 찾아가 꿈에 대한 해석을 부탁했다. 견훤이 꿈을 털어놓자 점술가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더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쪽문을 열고 승복을 입은 청년이 들어오더니 점술가의 목을 한 손에 틀어쥐고 죽여버렸다. 이어 견훤에게 엎드려 세 번 절하고는 “저를 책사로 삼으신다면 큰일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견훤이 승복 입은 사람과 성으로 돌아왔다. 만찬이 끝날 무렵 책사 최승우가 다시 견훤 앞에 엎드려 꿈을 풀이하며 “왕이 될 꿈이옵니다. 그러나 자식들을 잘 다스려야 나라가 오래갈 것입니다”라며 함께 일을 도모할 것을 청했다.견훤은 그날부터 최승우를 책사로 삼아 전라도 일대 성을 공격해 수하로 삼으며 영역을 넓혀나가기 시작했다. 3년 만에 전라도와 충청도, 경상도 일부 지역까지 영토를 넓히고, 전주에 궁궐을 지어 스스로 왕이라 칭하며 후백제라 나라 이름을 지었다.고구려 땅에서도 궁예가 군사를 일으켜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왕건이 뒤를 이어 고려라고 나라 이름을 고치고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견훤과 곳곳에서 맞부딪쳤다.견훤은 지혜롭고 용맹스러웠다. 한편 책사 최승우의 말에 귀를 기울여 대부분 그의 말을 따랐다. 최승우는 가까이는 물론 먼 훗날을 내다보는 안목을 가져 그의 전술과 책략에 견훤도 깜짝깜짝 놀라며 감탄했다.견훤은 부인이 여럿이었다. 아들도 아홉 명이나 되었다. 모두가 성장하면서 장군이 되고, 지혜롭기도 하여 가까이에서 견훤을 보좌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대구·경북 고교총동창회 (10) 김천 중앙고

김천 중앙고는 김천시 양천동에 위치한 기숙형 공립고다. 1964년 성내동에 3학급을 인가받아 금릉고등학교로 개교했다.1978년 교명을 김천 중앙고로 변경했다. 1980년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완전히 분리됐다.1981년말 김천 중앙고 부설 방송통신고 인가로 직장에 다니면서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청소년들의 향학열을 향상시키는 동시에 교육 활동 우수 교로 지정받았다.1995년 만정장학회 이병춘 회장의 교사 부지 희사(喜捨)로 지금의 양천동 현대식 교사를 신축, 이전했다. 그동안 지역과 국가 발전에 큰 버팀목이 된 인재 양성 등 1만6천여 동문을 배출했다.김천 중앙고 총동창회는 1981년 구성됐다. 창립총회를 거처 초대 동창회장은 장영길 회장이 맡았다. 이후 1994년까지 회장 임기는 1년이었다. 1995년부터 임기 2년으로 변경했다.현재 제29대 중앙고 총동창회는 전성호(13회) 회장과 이화(제14회) 수석부회장, 김진우(20회) 사무총장, 김영석(23회) 총무국장, 김민재(24회) 재무국장, 김동균(26회) 기획국장, 이현중(26회) 회원국장, 백문목(26회) 홍보국장, 김대근(25회) 행사지원국장, 이동수(25회) 대회협력국장 등으로 구성하고 동창회를 이끌고 있다.◆선후배 간 사랑의 결속 다지는 동문 가족 체육대회김천 중앙고는 56년 전통과 역사를 자랑한다. 매년 4월이면 전국에 흩어져 있는 동문이 학교 운동장에서 만나 체육대회를 통해 친목과 화합, 우의를 다지며 하나 된 열정과 뜨거운 동문 애를 과시한다.지난해 제30회를 맞은 김천 중앙고 동문 가족 체육대회에도 수백 명의 동문이 참석해 동문 간의 의사소통 기회를 넓히고 진한 우정을 나누는 뜻깊은 자리가 됐다. 옛날 까까머리 학창시절로 돌아가 옛 추억을 회상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2부 체육대회에서는 족구, 단체줄다리기, 훌라후프 등의 경기를 통해 서로 간 친목을 다졌다. 기수별(가족) 노래자랑, 연예인 축하공연, 행운권 추첨 등 다양한 부대행사로 행사의 흥을 돋우며 동문의 화합과 단결의 장을 마련했다.또 도자기 체험, 페이스 페인팅, 풍선 만들기 등의 행사도 진행해 어린이를 비롯한 가족들에게 참여기회를 제공했다.동문가족 체육대회는 학교와 동창회의 발전을 위해 동문 선후배 간 사랑의 결속과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가는 소중한 자리가 되고 있다.동문들은 체육대회 외에도 산악, 골프모임을 통해 화합과 결속을 다지며 모교 발전에 힘을 보태고 있다.◆혁신도시로의 이전에 앞장선 동창회김천 중앙고는 율곡동(김천혁신도시) 이전이 확정됐다. 경북도교육청이 2023년 이전을 목표로 추진해온 김천 중앙고 김천혁신도시 이전 건이 지난해 12월 열린 교육부 수시 3차 중앙투자심사를 통과했다.이로써 김천 중앙고는 교육과정 변화에 따른 교실 부족과 미래 학교를 향한 교육 환경의 선진화를 꾀할 수 있게 됐다. 공교육 교육기관으로써 지역사회 인재양성 공헌은 물론 학교의 안정적 발전을 도모하는 계기도 마련하게 됐다.지난해 이전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70.7%가 찬성했다. 같은 해 8월 율곡초등학교에서 경북도교육청 주관으로 중앙고 학교 이전 설명회에 200명이 참석해 함께 공감대를 형성했다.뿐만 아니라 율곡동 주민 90% 이상, 부도심 50% 이상, 동창회와 학생회 그리고 학부모 100%가 이전에 찬성했다.현재 중앙고 이전은 2023년에 이전 개교를 희망하고 있다. 총 1만5천781㎡ 부지에 학년당 8학급으로 총 24학급에 특수반까지 25학급 규모다. 남녀 공학으로 준비하고 있다.이 같은 성과는 총동창회에서 2018년 1월 학교이전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지속적인 학교 이전 홍보와 서명운동 전개, 유관기관과의 협력체계 구축 등 학교 이전을 위한 아낌없는 지원과 노력을 한 결과다.◆학교 이전에 따른 부지 활용 방안은김천 중앙고는 2023년 율곡동 이전 확정으로 28년간의 양천동 시대를 뒤로하고 김천혁신도시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됐다.중앙고 이전에 따른 학교 부지 활용 방안에 대해 김천시의회 나영민(19회) 운영위원장을 중심으로 다양한 논의가 시작되고 있다.최소의 비용만으로 기존 체육시설과 교실 등을 리모델링해 각종 경기 종목 선수들이 전지훈련을 할 수 있는 스포츠 전용 훈련센터를 건립하자는 게 첫 번째 안이다. 이렇게 되면 양천동 인근을 학생 경기 중심의 특화된 지역으로 집중 개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기존 종합스포츠타운 외 또 다른 체육 인프라를 구축할 수 있다.둘째, 경북도 서부권(김천·구미·문경·상주·성주·칠곡 등) 119 안전체험관 건립이다. 학생안전 및 다양한 재난사고 예방을 위한 전문화된 컨트롤타워 역할을 수행하면서 경북 서부권 학생들의 안전 관련 의무교육과정 이수 기능을 담당하도록 한다는 계획이다.셋째, 어린이들에게 편리하게 지식·교육·정보 등 다양한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어린이 전용도서관을 설치하자는 제안이다.특성화된 문화관광축제를 발전시키기 위한 전문재단(가칭 축제전문센터 또는 문화관광재단)을 건립하자는 게 네 번째 계획 안이다.김천 중앙고는 머지않아 양천동을 떠난다. 하지만 양천동 중앙고 부지는 쇠퇴의 기로를 걷고 있는 기존 도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장소로 변신을 도모하고 있다. 시민 모두가 만족할 만한 최적의 활용 방안이 기대된다.◆김천중앙인재장학회 장학사업김천중앙인재장학회(이사장 정인하)는 ‘동창회를 활력 있게 모교를 명문으로’라는 슬로건으로 모교 발전과 자라나는 중앙 후배들을 위해 2004년 발족했다. 2008년 재단법인으로 재발족해 200여 회원과 이사들이 참여하고 있다. 매년 6천만 원 이상의 장학금을 후배들에게 전달하면서 장학 명문 고교로 부상하고 있다.유도 명문고의 이미지만 강했던 김천 중앙고는 2019학년도 대학 수시모집에서 서울대와 고려대, 연세대 등 스카이(SKY) 대학 등 유명대학과 의대 등에 8명이 합격했다. 졸업생 상당수가 대기업과 공직사회에 진출하면서 장학지원 사업의 성과를 피부로 느끼고 있다.장학제도는 우수 신입생 유치 학습지원금과 모의고사 장학금, 진학 장학금 3가지로 나뉜다. 성적이 뛰어난 신입생에게는 각 100만~500만 원을 지원한다. 국어와 영어, 수학 모의고사 성적이 1~3등급이면 30만~200만 원을 해당자 모두에게 지급한다.또 서울대 진학자에게는 4년간 등록금 전액을 지원한다. 고려대, 연세대, 카이스트, 포스텍, 의과대, 한의대 진학자에게는 학기당 100만 원, 재학 중 총 800만 원의 장학금을 지급한다.매년 6천만 원에 가까운 장학금을 지급하는 학교는 김천 중앙고가 지역에서는 유일하고 경북에서도 찾아보기 쉽지 않다.장학금 지급 인원과 그 액수도 2008년 첫해 25명 1천640만 원에서 지난해 63명 4천800만 원 등으로 해마다 늘고 있다. 지난 12년 동안 716명이 6억3천343만 원의 장학혜택을 받았다.◆전성호 총동창회장 인터뷰전성호 총동창회장은 “총동창회장의 중책을 맡아 막중한 책임을 느낀다”며 “오랜 염원과 숙원사업인 혁신도시 모교 이전이 여러 동문의 단합된 힘과 노력으로 확정된 만큼 선후배 동문과 함께 ‘자랑스런 중앙인, 빛나는 중앙고’라는 슬로건으로 명문고로 제2의 도약을 이룩하는데 모든 열정을 쏟겠다”고 강조했다.앞으로 학교 백년대계를 위한 자세로 부족한 모교 부지를 넓히는데 역점을 두고 교사 건립과 시설 인프라 등 각종 현황을 살피는데 책임을 다하겠다며 동문들의 많은 참여를 당부했다.그는 “김천중앙고장학회는 연간 약 6천만여 원의 장학금 지급과 가장 중요한 우수 신입생 유치에서부터 이들이 공부를 잘할 수 있도록 학습지원금을 후원한다”며 “우수 신입생 유치, 동문특강, 모의고사 장학금 지급, 우수 신입생 대학투어, 동문 멘토 등 학교와 유기적인 관계로 후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또 “장학회 발족 이후 매년 서울지역 우수 대학에 진학은 물론 국립대 및 4년제 사립대학에 80% 정도 진학하고 있다”며 “모교 후배들이 대학 진학 후에도 선두 그룹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은 모두가 동문 선배들의 힘이며, 장학회 후원 덕분이다”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특히 “김천중앙인재장학회에는 초대 이사장을 역임한 최외출 동문(영남대 부총장, 글로벌새마을학회 회장)과 현 정인하 이사장(7회, 육군3사관학교 총동문회장)을 비롯한 채한철 동문(현대자동차 이사) 등 150여 이사가 참여하고 있다”며 “모든 참여 동문에게 감사드리고, 자라나는 후배들에게 꿈과 동기부여를 줘 미래 김천 중앙고가 명문으로 거듭나는데 앞장서겠다”고 다짐했다. 안희용 기자 ahyon@idaegu.com

뇌졸중, 24시간 내 수술로 삶의 질을 높이다

뇌졸중은 뇌에 혈액을 공급하는 혈관이 막히거나 터져서 뇌손상이 오고 그에 따른 신경학적 장애가 나타나는 질환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뇌졸중을 ‘갑작스럽게 진행하는 국소적 또는 완전한 뇌기능장애가 24시간 이상 지속하거나 심하면 사망에 이르는 질환으로, 뇌혈관의 병 이외 다른 원인이 없는 경우’라고 정의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의학의 영향으로 뇌졸중을 중풍이라고도 통용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중풍에는 의학적으로 뇌졸중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질환들이 많이 포함된 것 또한 사실이다. 따라서 뇌혈관 질환, 중풍 혹은 뇌졸중은 사회적으로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뇌졸중이 가장 정확한 용어다. ◆30~40대도 발생 뇌졸중의 뜻은 그 문구에서 알 수 있듯이 뇌가 갑자기 심한 일격을 맞는다는 것이다. 뇌졸중은 심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고 반신마비, 언어장애 등이 남을 수 있는 무서운 질병이다. 뇌졸중은 우리나라 사망원인 중 세 번째로 많은 원인을 차지할 뿐 아니라 성인에서 신체적 장애를 일으키는 주범이기도 하다. 특히 이러한 신체적 장애는 환자 본인은 물론 가족구성원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주로 노인질환으로 인식됐지만 요즘은 30~40대에도 뇌졸중이 흔히 발병한다. 이는 식생활의 변화와 운동부족으로 인해 뇌졸중의 주요 위험 인자인 비만, 고혈압, 당뇨병, 고지혈증 등의 발생률이 높아졌고, 이에 대한 조절이 적절하게 되지 않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뇌졸중은 뇌혈관이 갑자기 막혀서 영양분과 산소가 혈액을 통해 뇌 조직에 공급되지 못해 뇌손상이 발생하는 허혈성 뇌졸중(뇌경색, cerebral infarction), 뇌혈관이 터져서 생긴 혈종이 뇌조직을 손상시키는 출혈성 뇌졸중(뇌출혈, cerebral hemorrhage)으로 구분된다. ◆뇌졸중 치료법 급성 허혈성 뇌졸중(뇌경색)의 경우에는 환자의 상태(발병 후 경과 시간, 도착 당시 환자의 신경학적 증상 등)와 검사 결과(CT, MRI, MRA 등)를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다음 뇌 손상의 진행 정도, 뇌부종의 동반 정도 등을 고려한 혈전 용해제 투여, 막힌 뇌혈관을 뚫는 혈관 내 수술(혈전제거술)을 할 수 있다. 통상 발병 후로부터 6~8시간 안에 병원에 도착해야만 뇌혈관 막힌 곳을 뚫어주는 혈관 내 수술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24시간 또는 그 이상도 선택적으로 수술이 가능한 적응증(약제나 수술에 의한 치료 효과가 기대되는 것)이 확대되고 결과도 좋아지고 있다. 혈관 내 수술이 불가능하더라도 두개강외 동맥과 두개강내 동맥을 연결해주는 혈관 문합술을 시행할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뇌압항진 조절을 위한 두개골 제거 및 감압술을 시행하여 환자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이와 함께 출혈성 뇌졸중(뇌출혈) 치료에서는 코일 색전술을 비롯한 혈관 내 수술의 발전으로 환자의 치료 성적이 좋아졌다. 앞으로도 여러가지 의료기술의 발전 및 임상 연구의 결과로 뇌출혈 치료에도 좋은 결과가 기대된다. 허혈성 뇌졸중(뇌경색) 분야에서도 최근 눈부신 발전을 하게 된 혈관 내 수술로 혈전을 제거하는 방법과 두 개 정도의 혈관을 이어주는 혈관문합술이 점점 발전하고 있어 앞으로도 신경외과 뇌졸중 분야의 주요 이슈가 될 것으로 보인다. 뇌졸중의 치료는 약물 치료에서부터 수술적인 치료, 재활 치료가 적절히 이뤄져야 환자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 도움말=영남대병원 신경와과 김종훈 교수이동률 기자 leedr@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53) 의자왕

삼국유사는 기이편에서 신라 왕조사는 56왕 중 36왕에 대해 길게 이어 기록하고 있지만 백제에 대해서는 아주 인색하다. 678년 백제 역사를 남부여시대, 무왕, 그리고 후백제 이야기로 줄이고 있다. 백제 멸망의 역사 의자왕 20년은 쥐꼬리만큼도 언급하지 않았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백제 마지막 왕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한다.백제의 마지막 왕으로, 백제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의자왕은 어릴 때는 효심이 깊고 형제들과 우애가 깊으며 지혜로워 동방의 해동증자로 불렸다.수수께끼의 서동, 무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삼십 대에 세자로 책봉됐다. 의자왕으로 왕좌에 오르면서 선정을 베풀며 성군 소리를 듣는 한편 직접 신라 정복전쟁에 나서 30여 성을 빼앗는 성과를 올렸다.무왕에 이어 나라를 튼튼한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집권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여색에 빠져 정국이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결국 678년 백제의 막을 내리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어버렸다.의자왕이 신라의 주적이 되어 삼국통일의 첫 번째 희생양이 되었던 것은 대야성 전투에서 김춘추의 딸과 사위를 죽여 성문에 내걸었던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김춘추의 뿌리 깊은 원한으로 결국 의자왕은 백마강 낙화암에서 3천 궁녀가 투신해 꽃 무리로 지는 전설을 남기는 주인공이 되고 있다.◆역사: 백제의 마지막 임금 의자왕-출생: 백제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해동의 증자로 불릴 정도로 효심이 깊고, 형제간에도 우애가 두터웠다. 정확한 출생연도는 기록되지 않고 있다. 아버지인 무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인 595년쯤으로 추정할 수 있다.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이다. 서동과 선화공주의 유명한 설화를 기록한 삼국유사는 서동이 백제 무왕이고 선화공주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이라 했다. 선화공주가 의자왕의 어머니라고 설명한다. 의자왕이 즉위 초기 정치적 입지가 취약했던 이유는 외가가 적국인 신라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설득력 있다.한편 선화공주라는 인물은 존재했으나 신라 진평왕의 딸이 아니라 익산 지역 유력한 호족의 딸이 아니었을까 하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의자왕이 태자에 책봉된 것은 632년, 무왕 33년의 일이다. 삼십 대 중반이 넘어서야 태자로 책봉된 것이다. 그에 대한 내부 견제가 적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의자왕 즉위: 의자왕은 641년 왕위에 오른 이듬해 어머니가 죽자 동생인 교기와 여동생 4명 등 40여 명을 섬으로 추방하는 전격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자신의 즉위를 반대했거나 그 원인이 되었던 인물들을 제거한 것으로 보인다.의자왕은 즉위한 그해부터 내부의 권력 기반을 다지고 나서 직접 전쟁에 나서 연이은 승전고를 울리며 자신의 역량을 과시했다. 전쟁의 선봉에 서서 신라를 공격해 미후성 등 40여 성을 함락시켰다.그러나 백제 멸망을 가져온 원인도 이때 비롯됐다. 윤충을 보내 신라의 전략적 요충지인 대야성을 공격해 성을 함락시키면서 김춘추의 딸인 고타소와 사위 김품석을 비참하게 죽였다는 데 있었다. 딸과 사위의 사망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고구려, 왜, 그리고 당나라를 직접 방문하며 목숨을 건 외교전을 벌인 끝에 결국 당나라와 군사연합을 맺어 백제를 멸망에 이르게 했다.의자왕은 집권 초기 외교에도 탁월한 수완을 보였다. 즉위한 해부터 5년 동안 계속해서 당나라에 조공하며 관계를 다졌고, 왜와도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또 고구려와도 힘을 합쳐 신라를 군사적으로 압박했다. 의자왕은 집권 전반기에 곳곳에서 신라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며 전쟁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의자왕의 타락: 집권 15년을 넘기면서 의자왕은 크게 변했다. 그해 태자궁을 수리했는데 대단히 사치스러웠다. 이듬해 왕이 궁인들과 더불어 주색에 빠져 마음껏 즐기고 술을 마시기를 그치지 않았다. 의자왕 17년에는 왕이 아들 41명을 좌평으로 임명하고 각기 식읍을 내려주기도 했다.의자왕의 치세가 흐트러진 이유는 은고라는 여인이 의자왕의 마음과 함께 권력을 거머쥐면서 벌어진 전횡 때문이다. 권력 기반을 다진 의자왕이 외형적으로 왕권이 안정되자 긴장감이 풀어진 탓이라는 해석도 있다.-백제의 멸망: 백제가 이러한 분열을 겪고 있을 무렵 나당연합군이 침입했다. 13만 대군을 이끈 소정방이 바다를 건너 인천 앞바다에 있는 덕물도에 정박했고, 김유신이 이끈 5만의 신라군은 백제의 동부 전선을 빠른 속도로 돌파했다.예상치 못한 연합군의 공격에 백제의 조정은 대책을 찾지 못한 채 우왕좌왕했다. 의자왕은 우선 계백에게 결사대 5천을 거느리고 황산에 가서 신라군에 맞서게 했다. 백제군은 열 배가 되는 적들과 만나 네 번 접전해 네 번 다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 마침내 패전하고 계백은 전사했다.당나라 군사까지 사비성에 들이닥치자 왕은 태자와 함께 웅진성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웅진성을 지키고 있던 예식진이 의자왕을 배신하고 당에 항복하게 했다. 포로가 된 의자왕은 당의 소정방과 신라 무열왕에게 술잔을 올리는 굴욕을 겪었다. 태자 효를 비롯 왕자들과 대신, 장병, 그리고 백성 1만2천여 명과 함께 당나라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삼천궁녀: 의자왕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 백제를 멸망으로 이끌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그러나 백제인의 시각에서 서술한 역사서에는 삼천궁녀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 전쟁의 승자 신라인의 시각에서 전하는 적장의 부정적인 모습으로 왜곡되고 있다. 당시 사비성의 인구가 5만여 명으로 추산되는데 3천 명의 궁녀가 있었다는 건 믿기 어렵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왕의 여자의자왕은 지혜롭고 용맹했던 무왕과 선화공주의 맏아들로 태어나 엄격한 수업을 받으며 훌륭한 인품을 가진 인물로 성장했다.그러나 무왕이 백제 귀족들의 전략에 따라 많은 후궁을 들여 50여 명의 자식을 두게 되면서 후계구도가 복잡하게 경쟁적인 형상으로 전개됐다.왕실에 여식을 들인 귀족들은 자신들의 입지 강화를 위해 제각각 외손을 태자로 책봉하려는 권모술수를 펼치며 의자왕의 태자 책봉에 태클을 걸었다. 의자왕이 신라인의 핏줄이라는 것이 가장 큰 핑계로 거론되었다.무왕의 안정적인 왕권 유지를 위한 강력한 의지로 결국 의자왕은 삼십 대 후반에 태자에 책봉되고 이어 왕위를 이어받았다. 의자왕은 왕위에 즉위하면서 태자 책봉에 걸림돌로 작용했던 세력들은 거침없이 숙청을 단행했다. 또 자신의 발목을 잡았던 신라를 보란 듯이 짓밟는 전쟁의 정복군주가 되었다.의자왕은 15년간 강력한 이미지를 풍기는 전쟁의 왕으로 군림하다, 아비 대신 전쟁터에 나온 여장부 은고를 만나 깊은 사랑에 빠져버렸다. 적진 속으로 깊숙이 뛰어들어 칼춤을 추다 위험에 빠진 은고를 구해낸 의자왕의 부하 사랑에 감동한 은고는 그날부터 온전히 의자왕의 여인이 되었다.은고의 상처를 치료하면서 남장을 한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된 의자왕은 이성적으로 눈을 뜨게 되고, 온전히 목숨을 바쳐 헌신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여장부 은고의 치마폭으로 서서히 빠져들었다.전쟁에서 돌아온 의자왕은 사비성을 환락의 성으로 꾸미기 시작했다. 성의 동북쪽 경계이자 천연요새로 만든 백마강 언덕 낙화암에 정자를 짓고, 궁궐의 남쪽에는 인공연못을 만들어 궁남지를 꾸며 고구려와 신라 등 삼국을 통틀어 가장 화려한 정원 예술을 기록했다.의자왕이 갑옷을 벗어 던지고 은고와 후궁들의 치마폭에 빠져 나랏일을 잊은 5년, 귀족들의 문란한 정치가 낙화암 삼천궁녀의 전설을 남기며 백제의 문을 닫게 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대구·경북 고교총동창회 (9) 대구 달성고등학교 총동창회

1973년 개교한 대구 달성고등학교는 1천100여 명이 재학 중인 서구 대표 학교다. 자율형 공립고등학교로서 각종 특색 및 맞춤형 학력 향상 프로그램들을 운영해 재학생의 학업 증진에 도움을 주고 있다. 개교 후 40여 년의 세월이 지난 현재 45회 졸업생을 배출, 그 수만 2만6천656명이다. 그 뒤에는 그동안 달성고 총동창회가 버팀목으로 자리하고 있기에 가능했다. ◆각계각층의 달성인 대구 달성고가 개교한 지 올해로 47년이다. 2만여 명의 인재를 배출해 냈다. 총동창회가 처음 조직된 시기는 1976년 당시 1회 졸업을 앞둔 3학년들이 발기인 총회를 열고, 회칙 제정과 초대 회장으로 정경목(1회) 동문을 선임하면서 출발했다. 본격적인 활동은 1992년 동창회 사무국을 직제운영하면서다. 동문들의 소식을 알리는 동창회보 ‘달고 나온 사람들’ 발간(1995년, 현재 31호)과 동창회 명부(1997)를 발행했다. 동창회관 ‘청운관’ 건립(1999년), 기숙사인 ‘달성학사’(2012년)도 개관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해왔다. 졸업생들은 재계, 학계, 금융계, 경찰계, 군계, 법조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자리 잡고 있다. 미래한국당 이종명 국회의원(경북 청도 비례)과 더불어민주당 정재호 국회의원(경기 고양을)을 비롯해 이강덕 포항시장, 손봉기 대구지방법원장, 이시복 대구시의원, 우상현 W병원장, 윤태경 바로본병원 이사장, 김재홍 대구시 대한하키협회장 등 각계각층에 포진해 있다. 현재 대구의 총동창회를 중심으로 서울, 경기, 부산, 포항, 경주, 구미, 경북 북부 등 지역별 동창회와 공우회(공무원), 달법회(법조계), 달경회(회계사, 세무사, 국세청) 등 직능별 동창회가 별도로 열리고 있다. 달성 경상 아카데미(경상계 교수), 달우회(여행업), 달유회(대구 유통단지) 등 직종별 동창회를 포함해 대학연합 동창회, 달동회(동구달고나온모임) 등 100여 개에 이르는 단위 모임이 구성돼 선후배 간 교류가 이뤄지고 있다.◆1천 명이 함께하는 정기행사 달성고 총동창회는 매년 다양한 행사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신년교례회(1월), 가족등반대회(4월), 진로콘서트(7월), 총동창회장배 골프대회(8월), 가족한마당 체육대회(10월), 총회(12월)를 주최하고 있다. 달성고 총동창회의 연중행사는 1월 신년교례회를 시작으로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지난 1월18일 동구 호텔 인터불고에서 신년교례회를 열고, 500여 명의 동문 간 결속을 다졌다. 화창한 봄과 활동하기 좋은 가을에는 가족과 함께 하는 등반대회와 가족한마당 체육대회가 매년 열린다. 특히 달성고 운동장에서 열리는 가족한마당 체육대회는 평균 800~1천 명이 참석해 최대 행사 중 하나로 꼽힌다. 진로콘서트는 전문직에 종사하는 동문이 재학생 1~2학년 대상으로 진로 지도를 하는 프로그램이다. 동문 각 분야에서 28명을 선발해 1시간씩 총 2시간 동안 재학생들에게 직업의 특성과 경험담 등을 전달한다. 매년 8월 넷째 주 일요일에 개최하는 총동창회장배 골프대회는 전국 달성인이 모여 240여 명(60팀)이 함께 스포츠를 즐기고 있다. ◆선배가 후배 이끈다 달성고 총동창회는 동문 간의 단합과 더불어 장학사업 추진을 통해 후배양성에 힘쓰고 있다. 현재 장학재단의 기본 재산은 3억 원이며, 예비 재산은 2억6천만 원에 달한다. 1998년 11월 3회 동기회(1천만 원)를 시작으로 기수별 장학기금의 기탁이 이어졌다. 그동안의 발자취를 살펴보면 1999년 4회(2천만 원), 2000년 5회(1천만 원), 2001년 6회(1천만 원), 2002년 2회(2천만 원), 7회(1천만 원), 2003년 8회(1천만 원), 2004년 9회(1천만 원), 2005년 10회(1천만 원) 등이다. 11~12대 장두형 총동창회장 및 236명의 동문이 가칭 ‘달성장학회’ 사단법인 설립 기금으로 4천700만 원을 모금했다. 이후 재단법인을 재추진했고 2006년 1회(1천만 원), 11회(1천만 원), 2007년 12회(1천만 원), 재경동창회(100만 원), 및 10회 이상규(1억 원), 2008년 3회(2천만 원), 1회 신현고(100만 원), 5회 이성구(200만 원), 동대구농협 동문 일동(100만 원) 등을 통해 기본 재산 3억 원을 마련했다. 2007년 당시 1회부터 12회까지 동기회장을 당연직 이사로 선임해 재단법인을 발족하기로 결의를 하고 설립추진이 진행됐다. 기금모금 10년 만인 2008년 7월11일 재단법인 달성고 총동창장학회 창립 기념식을 열었다. 안정적인 기금확보를 위해 CMS 계좌를 개설하고, 서울지역 동문을 중심으로 200여 명의 동문 참여를 이끌어냈다. 2011년 5월 새로운 등기 이사진을 구성하며 기금확보를 위한 이사의 분담금을 1년에 100만 원 이상으로 책정하고 본격적인 기금확충에 나서게 된다. 달성고의 장학재단은 지금까지 459명의 동문이 참여해 4억4천649만 원의 기금과 각 기수가 출연한 기금 3억1천150만 원이 모금됐다. 이를 통한 주요사업 현황으로는 재학생 및 졸업생 장학금 지원 2억4천480만 원과 모교 기숙사 건립 지원금 8천만 원, 하키부 차량 지원금 1천만 원 등 장학사업을 진행했다.----------------------------------------------------------------------------------------------------◆달성고 이승한 총동창회장 인터뷰 “단순한 동문 모임을 넘어 나아가 지역 사회에 보탬이 될 수 있는 달성고 총동창회가 됐으면 합니다.” 지난 1월 19대 달성고 총동창회장으로 취임한 이승한 회장(이바담 그룹의원 대표원장)이 앞으로 총동창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회장은 달성고 총동창회의 가장 큰 특징을 단결력과 활발한 동문 활동을 꼽았다. 그는 “우리 동문은 단결력이 있고 관련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활동한다는 장점으로 인해 총동창회가 점차 성장하고 있다”며 “타 고교 동창회보다 행사 종류가 많고 크다. 한 기수당 100여 명으로 구성된 25기수가 참여하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이러한 결속은 학창시절 학업에 대한 공부에 열의가 기반됐다는 것. 이 회장은 “1981년 졸업 당시에만 해도 학교는 담장 대신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앞 도로는 흙길로 된 왕복 2차선이었다”며 “비가 오면 흙이 신발과 바지에 다 묻고 진흙길에 발이 빠지는 등 열악한 환경 속에서 등하교했지만 모두 공부로 성공하겠다는 열정 만큼은 전국 최고였다”고 말했다. 또 그는 “정말 공부를 열심히 했다. 선생님들이 철저한 지도 및 가르침으로 이끌어줬고 학생들은 이에 성적으로 응하는 뒤따름이 있었다”며 “학창시절 학년당 총 12반이었는데 의사(한의사 포함)가 60여 명이 배출될 정도로 우수한 성적과 학업 분위기가 조성됐었다”고 회상했다. 학업에 충실했던 선배를 따라 현재 후배들도 같은 길을 걸었으면 하는 게 이 회장의 바람이다. 이 회장은 “현재 달성고는 교육환경, 내부 시설, 접근성 등 모든 면에서 완벽히 갖춘 학교라 자부할 수 있다”며 “향후 과거 선배의 영광을 재현시키고 후배가 이를 보고 그 정신을 이어받는 동창회관 내 역사관 건립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했다. 이 회장은 대한민국과 달성고의 발전은 교육이라는 요소로 일맥상통함을 강조했다. 그는 “재학생을 포함한 갓 졸업한 후배에게는 주어진 현실에 열심히 하고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는 당부의 말을 전하고 싶다”며 “사회에서 활동 중인 선배에게는 후배에 늘 모범이 될 수 있도록 언행을 부탁한다”고 했다. 앞으로 달성고 총동창회의 역할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이 회장은 “선후배 간 총동창회를 승계하고 부족함 없이 이어나가도록 하는 게 신임 회장으로서 가장 큰 책무”라며 “향후 봉사활동 및 취약계층 돕기 등 단순한 동문 모임에서 벗어나 지역과 나라에 이바지할 수 사회 활동을 더욱 늘여나가겠다”고 밝혔다.김종윤 기자 kjyun@idaegu.com

한눈에 세계여행 하기 (7) 말레이시아·①페낭

말레이시아는 페낭, 랑카위, 코타키나발루 등 흥미로운 볼거리와 관광 인프라가 가득하다.페낭(Penang) 섬은 말레이시아 반도 북서쪽 해안에 위치한 다양한 볼거리를 지닌 휴양의 섬이다.말레이 반도와 폭 4.4㎞의 좁은 해협을 경계로 인도양 위에 떠있어, 위에서 보면 거북이 모양을 하고 있다.페낭은 ‘동양의 진주’, ‘인도양의 에메랄드’라는 별칭답게 다채로운 볼거리가 있는 훌륭한 관광지다.식민지 풍의 낡은 건물과 허름한 뒷골목들을 끌어안고 있는 조지타운 시내, 바다를 향해 리조트 타운이 늘어서 있어 어느 쪽으로 카메라 앵글을 맞춰도 그림과 같은 이국적인 풍경을 스케치할 수 있다.특히 페낭은 동서 문화의 합류 지점이었던 지역적 특성을 바탕으로 다양한 식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곳이다.섬 특유의 개성이 절충된 노냐 요리를 비롯해 인도나 중국의 포장마차 요리까지 여행객들의 미각을 즐겁게 해주는 환상적인 레스토랑들이 있다. ◆페낭의 골목 여행 가볼까…조지타운·페낭 브릿지·페낭 힐 등조지타운(Georgetown)은 페낭의 섬 북서쪽에 위치해있다.섬의 주도인 조지타운은 2008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도시로 등재됐다.다양한 개성을 지닌 이 도시는 역사적 건축물과 풍부한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다.거리 곳곳에서 동서양의 문화가 돋보이는 다채로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가볼 만한 명소들은 대부분 도보로 이동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 내에 위치해 조지타운의 거리를 걷는 것 자체만으로도 여행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또 화려하게 장식된 트라이 쇼를 타면서 골목의 구석구석을 둘러보는 것도 색다른 추억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페낭 브릿지(Penang Bridge)는 말레이시아 본토와 페낭 섬을 잇는 총 13.5㎞의 다리로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긴 다리다.페낭 브리지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에서 영감을 받아 건설됐으며, 매년 페낭 브리지 마라톤 대회가 개최된다.드라이브 삼아 페낭 브리지를 달리다 보면 다리 양쪽으로 펼쳐진 웅장한 해변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페낭의 주요 명소 중 하나인 페낭 힐은 도시의 더운 열기를 피해 시원하면서도 조용한 곳을 찾는 이들에게 안성맞춤이다.페낭 힐은 해발 833m며 깃대 언덕으로 불린다.정상에 올라서면 조지타운부터 본토의 주변 지역까지 광활하게 펼쳐진 장엄한 전경을 볼 수 있다.페낭 힐은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동식물들이 서식하고 있으며, 일부 식물들 중에는 쥐라기 시대부터 존재했던 식물군도 관찰할 수 있다.새로 설치된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정상까지 30분 이내에 도착할 수 있다.또한 곳곳에 마련된 산책로에서 자연 그대로의 모험을 즐길 수도 있다.바투 페링기 비치(Batu Ferringhi Beach)는 오늘날의 ‘해변 리조트 휴양지’ 페낭을 만든 명소다.바투 페링기 비치의 해안선을 따라 즐비하게 들어선 리조트들은 저마다 전용 해변과 수영장은 물론이고, 어린이들을 위한 부대시설 또한 다양하게 갖추고 있다.또한 이곳을 해양 스포츠의 천국이라고 불릴 만큼 바다를 주제로 한 거의 모든 레포츠를 즐길 수 있다.바닷물에 몸을 맡겨 수영을 즐기거나 제트스키에 올라 바다를 가르는 상쾌함을 경험할 수 있다.산호초가 발달한 작은 섬으로 이동해 스노클링을 하거나 열대어에게 먹이를 주는 코랄 섬 투어도 페낭에서 경험할 수 있는 재미있는 관광 상품이다.특히 매일 저녁 7시부터 수백 개의 노점상들이 들어서는 바투 페링기의 노천시장은 페낭의 인기 있는 명소 중 하나로 다양한 기념품과 장식품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다. ◆웅장한 자태를 뽐내는 페낭의 다양한 사원켁록시 사원(Kek Lok Si Temple)은 중국식 불교 사원이다.아에르 이탐(Ayer Itam)의 언덕 꼭대기에서 웅장한 자태를 뽐내는 사원으로,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불교 사원 중 하나다.웅장한 사원 내부는 정교하고 섬세한 조각품들이 가득하며, 천장은 화려한 불교 색채의 그림들로 장식돼 있다.이 사원은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내부 벽면 층마다 각기 다른 색으로 칠해진 1만 개의 부처탑이라 불리는 7층 석탑과 37m 높이에 달하는 자비의 여신인 쿠안 인(Kuan Yin) 동상으로 유명하다.특히 석탑 8각의 밑 부분은 중국, 가운데 부분은 태국, 꼭대기의 나선형 돔은 버마의 건축 양식을 채택해 약 20년에 걸쳐 완공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또 미얀마 사원은 매년 4월경 펼쳐지는 워터 페스티벌의 개최지다.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코끼리 형상이 인상적이다.타이 사원은 길이 33m로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금박 와불상을 볼 수 있는 태국식 불교 사원이다.뱀 사원은 1850년에 초승콩(Chor Soo Kong)이라는 중국 성인을 기리기 위해 건설됐다.이곳에서는 뱀을 성인의 수호자로 여기기 때문에 여러 마리의 뱀들을 사원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중국인 사업가 청팻쯔의 대규모 저택 눈길청팻쯔 맨션(Cheong Fatt Tze Mansion)은 인디고 블루 컬러의 중국식 중정 주택으로 1880년대 조지타운에 세워졌다.19세기 영국 식민지 시대 페낭에서 이름을 떨쳤던 중국인 사업가 청팻쯔의 개인 저택이다.중국에서 온 명공들에 의해 건설된 이곳은 38개의 방, 화강암이 깔린 5개의 중정, 7개의 층계, 220개의 창문을 갖춘 대규모의 저택이다.청팻쯔 맨션은 1990년대 로렌스 로(Laurence Loh)의 소규모 문화유산 보존 단체에 의해 개발 위기에서 벗어났다.이곳은 화려한 중국식 목재 조각, 고딕 양식의 미늘창, 자기 조각을 오려 붙여 장식한 적갈색의 벽돌담, 아르누보 양식의 스테인드글라스 창, 영국의 도자기 마을 스톡-온-트렌트(Stoke-on-Trent)에서 제조된 타일, 스코틀랜드산 주철 부품 등 화려한 인테리어를 자랑한다.풍수지리에 입각해 배치된 이 저택의 내부는 희귀한 조각품과 태피스트리, 다양한 골동품들로 가득하다.한화 22억 원가량인 760만 링깃 규모의 복원 작업 후 청팻쯔 맨션은 2000년 유네스코 주최로 개최된 아태 문화유산보존상에서 아시아 환태평양 지역 부문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또 페낭 페라나칸 맨션(Pinang Peranakan Mansion)은 과거 페낭에 정착한 중국인들 삶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곳으로 웅장한 대저택이다.페나라칸 맨션은 19세기 객가(Hakka)족 주석 광부이자 해산(HaiSan) 비밀결사조직의 지도자로 활동했던 중국인 지도자 충켕퀴(Chung Keng Kwee)의 공관으로 사용됐다.1890년대 세워진 이곳에는 영국산 바닥 타일과 스코틀랜드산 철제 부품 그리고 중국산 목각판이 사용됐다.1천여 점의 골동품과 더불어 중국의 독특한 건축양식도 살펴볼 수 있다.◆중국 황실에 손색없어…사치를 더한 ‘쿠 콩시 고택’쿠 콩시(Khoo Kongsi)는 조지타운에 남아 있는 다섯 개의 문중고택 중 하나다.중국 복건(Hokkien) 지방의 이민자들이 페낭에 정착하면서 가장 먼저 했던 일은 페낭 주에서 가장 웅장한 문중고택을 짓는 일이었다.1890년부터 시작된 건축 작업에 의해 마침내 중국 황실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고택인 쿠 콩시가 탄생됐다.이러한 사치스러움 때문에 신의 노여움을 사 완공 첫날밤 원인 모를 화재로 건물이 소실되었다고 전해진다.결국 쿠 콩시는 1902년에 다시 착공을 시작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됐다.쿠 콩시는 하나의 작은 집성촌과 유사한 특징을 보인다. 높고 가느다란 기둥이 경사진 붉은 기와지붕을 지탱하고 있다.용, 봉황, 신화 속 동물, 유명한 중국 전설의 여러 장면을 새겨 넣은 조각들이 지붕을 장식하고 있는 쿠 콩시는 페낭에서 가장 웅장한 문중고택으로 꼽히고 있다.쿠 콩시의 가장 큰 특징으로 꼽히는 대강당은 눈부시게 빛나는 정교한 조각과 더불어 중국에서 건너온 명공들이 직접 제작했다는 화려한 기둥으로 장식돼 있다.페낭에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복건식 문중고택으로는 체아 콩시, 여 콩시, 림 콩시, 탄 콩시가 있다.-자료제공: 말레이시아 관광청구아영 기자 ayoungoo@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