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 (90) 무장사 미타전

무장사 미타전은 신라 39대 소성왕의 비 계화왕후가 왕의 죽음을 애도하며 세운 암자이다.삼국유사에서 왕후가 소성왕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슬퍼하고, 피눈물을 흘리며 상심했다는 구절이 보인다.소성왕이 즉위 1년 만에 죽었다는 것과 왕비의 피눈물이라는 단어로 짐작해보면 예사로운 죽음이 아닐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소성왕의 아들 애장왕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13세에 신라 40대 왕위에 올랐다.삼촌 언승의 섭정으로 나라를 운영했다.그러나 결국 41대 헌덕왕과 42대 흥덕왕이 된 삼촌 언승과 수종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신라 최초의 근친 간 살해로 왕위를 찬탈한 사례다. 흥덕왕 이후 희강왕, 민애왕, 신무왕으로 이어지는 혈육간의 왕권 쟁탈을 위한 전쟁은 신라하대 최고의 비극으로 기록된다. 실질적인 1천년의 역사를 가진 신라 패망은 원성왕이 즉위하면서부터 서서히 시작됐다는 학자들의 분석을 틀렸다고 부정하기 어렵다.계화왕후의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게 했던 미타전 설립 이면의 이야기를 추정해 본다. ◆삼국유사: 무장사 미타전서울(지금의 경주)에서 동북쪽으로 20리 가량 떨어진 곳에 암곡촌이 있는데 그 북쪽에 무장사가 있다.제38대 원성대왕의 돌아가신 아버지인 대아간 효양 즉 추봉된 명덕대왕이 그의 숙부 파진찬을 추모해 세운 절이다.골짜기는 너무도 기이하여 마치 깎아서 세운듯하다.절이 자리한 곳은 어둡고 그윽하여 저절로 텅 비어 순박한 마음이 생길 것이니 사문이 도를 즐길 수 있는 신령스런 곳이다. 절의 위쪽에는 아미타를 모신 옛 불전이 있다.소성대왕의 비 계화왕후는 대왕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근심과 증오로 마음은 애통함과 비통함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상심했다.그래서 지아비인 소성왕이 운명의 통곡에서 벗어나 극락왕생하도록 명복을 빌고자 생각했다.서쪽에 아미타라고 부르는 큰 성인이 있어 지극정성으로 귀의하면 잘 구원하여 맞아준다는 말을 듣고 “이것이 사실일진대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라 하고는 왕후가 입던 여러 가지 옷을 희사하고 궁중에 쌓아두었던 재물을 모두 털어서 이름난 장인을 불러들여 미타상 하나를 만들게 하였으며 아울러 신중도 만들어 모셨다. 이보다 앞서 이 절에는 노승 한 분이 있었다.어느 날 꿈에 부처가 석탑의 동남쪽 언덕 위에 앉아 서쪽을 향해 대중을 위하여 설법하는 것을 본 뒤, 이곳은 반드시 불법이 머무를 곳이라고 생각했으나 속으로만 생각하고 남에게는 말하지 않았다.그곳은 바위가 험준하고 계곡 물이 빠르게 부딪쳐 흐르는 곳이므로 장인들은 눈여겨보지도 않고 다들 좋지 못한 곳이라고 했다. 급기야 터를 닦자 곧 평탄한 곳을 얻어 불당을 세울 만했다.완연히 신령스런 터와 다름없어 보는 사람마다 깜짝 놀라 좋다고 칭찬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근래(고려시대)에 와서 옛날의 미타전은 허물어졌으나 절만은 남아 있다. 세간에서 전하기를 태종이 삼국을 통일한 후에 병기와 투구를 이 골짜기에 묻어버렸으므로 무장사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무장사지무장산 초입의 무장사가 먼저 설립되고, 그 이후에 미타전이 세워졌다.나라에서 사찰을 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무장사를 수리하는 명분으로 무장사 뒤편에 미타전을 지었던 것이다. 미타전의 아미타불조상사적비는 신라 39대 소성왕의 왕비 계화왕후가 소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무장사 뒤편에 아미타불을 만들어 모시고 그 내용을 기록한 비석이다. 원성왕이 태자로 책봉했던 아들들이 차례대로 죽어버리자 태자로 책봉했던 첫째 아들 인겸의 아들인 손자에게 왕위를 물려 줘 소성왕이 즉위한 것이다.그러나 소성왕도 왕위에 오른 지 1년 만에 죽음을 맞아야 했다. 소성왕의 죽음에 대한 내용을 기록한 사서는 찾아볼 수 없다. 단지 젊은 왕이 즉위 1년 만에 죽었다는 것과 왕비가 피눈물을 흘리며 애도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왕의 죽음이 석연치 않음을 짐작할 뿐이다. 원성왕 후손들의 비사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소성왕의 아들 애장왕이 13세에 왕위에 올랐지만 숙부 언승과 수종, 아버지의 친동생들에게 왕위에 오른 지 10년 만에 죽음을 당한다. 소성왕의 여동생은 오빠를 죽인 수종과 결혼해 10여년을 왕비로 함께 살았다. 소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성한 아미타불조상사적비는 그 양식이 독특하다.비의 받침돌 귀부가 쌍귀부로 조성됐고, 귀부의 윗부분에 12지신상을 돌아가며 새겼다. 비석의 글씨는 왕희지의 글씨를 집각한 것으로 조사됐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발견된 사적비의 비문에 미타전을 세운 내력이 기록돼 있다.3조각으로 파손된 비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 지금 현지에는 원본에 의해 제작한 비문과 남아 있는 귀부와 훼손된 이수로 복원해 두고 있다.보물 제125호로 지정됐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비운의 소성왕 부자신라 38대 원성왕 김경신의 고민이 깊어졌다.경신은 내물왕의 12세손이었지만 정식으로 왕위를 물려받을 처지가 아니었다.어렵게 왕위에 앉았지만 왕권을 강화해 왕위를 장자에게 물려주고, 나라를 편안하게 다스리고 싶었다. 그래서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기 위한 독서삼품과를 시행하는 한편 왕권에 대한 절대적 존엄성을 알리기 위해 당나라 대신들이 잡아가는 분황사 등의 호국룡을 다시 찾아오는 등의 다양한 설화까지 만들어 퍼뜨렸다. 그러나 원성왕의 왕권안정을 위한 노력은 그의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첫째 아들 인겸을 태자로 책봉했지만 왕위를 잇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절망한 왕은 둘째 아들을 태자로 책봉했지만 그 또한 아비보다 먼저 죽음을 맞았다. 원성왕은 고심 끝에 첫째 아들의 장자 준옹을 태자로 임명하고, 준옹은 39대 소성왕으로 등극했다. 준옹은 현명하고 사리에 밝았지만 몸이 약하고 소심한 편이었다. 또한 욕심이 지나쳐 형제들에게도 위엄을 지키지 못하고, 동생들에게도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반면 준옹의 동생 언승은 달랐다. 몸이 민첩하고 무술에 통달할 뿐 아니라 사람들을 휘어잡는 지도력과 친화력이 뛰어났다. 그래서 동생 수종과 충공도 둘째형인 언승을 잘 따랐다. 이 때문에 소성왕과 언승은 사사건건 부딪쳤다.병권과 인사권 등의 실질적인 권한도 언승이 손아귀에 넣고 있었다.소성왕이 이를 불편해 하면서 즉위 1주년 기념행사를 앞두고 대신들과의 회의에서 왕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크게 잔치를 벌리자는 언승의 주장과 조용하게 치루자는 소성왕이 크게 대립했다. 대신들의 회의에서 결정을 못 내리고, 형제들이 모여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회의를 열었다.이미 술이 어느 정도 취한 상태였던 언승과 형제들은 감정이 상해 과격해져 있었다.공교롭게도 언승이 내리친 주먹에 탁자가 갈라지면서 엎질러진 술병이 깨어졌고, 밀고 당기던 상황에서 소성왕이 넘어지면서 깨어진 술병 조각이 후두부에 박혀 죽음을 맞고 말았다. 언승은 수종, 충공 등의 동생들과 재빨리 수습에 들어갔다.왕이 낙상해 사망한 것으로 발표하고, 서둘러 조카 준옹을 40대 애장왕으로 옹립했다. 13세에 아무것도 모르고 왕위에 오른 애장왕은 숙부 언승의 섭정에 꼭두각시 왕노릇을 해야 했다.그러나 애장왕이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배경에 의심을 품게 됐다.애장왕은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꿈꾸면서 서서히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언승은 조카의 행동이 생각과는 다르게 조금씩 빗나가기 시작하자 그의 주변에 자신의 심복을 심어두고 드디어 애장왕의 꿍꿍이를 알아내고 말았다.언승은 다시 동생 수종과 충공을 불러 모의를 했다. 애장왕은 아버지의 복수는 시작도 하지못하고 아버지의 뒤를 따라야 했다.신라 최초의 근친간 살육전으로 인한 왕위찬탈이 이루어진 것이다. 본격적인 신라 멸망의 단초가 여기라는 이야기는 이어지는 왕위쟁탈 전쟁사로 증명된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뚜벅뚜벅 대구·경북 한 바퀴)<8>힐링 특구, 영주

경북 영주는 소백권과 태백권을 연접하고 있는 교통의 중심지다.풍부한 문화자원과 천혜의 관광자원, 뿌리 깊은 역사자원을 보유하고 있어 힐링 관광지로써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소백산 줄기에서 내려온 자연적 특성은 지친 현대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스트레스에 찌든 몸을 정화하기 제격이다.코로나19 예방과 방역이 일상화되며 ‘언택트’가 화두인 가운데 타인과의 접촉을 줄이면서 여행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경북 영주 관광이 주목 받고 있다.전국 최초로 ‘힐링 특구’로 지정된 영주에서 코로나 속 진정한 힐링을 경험해 보자.◆유네스코 세계유산, 부석사부석사는 건물의 전체 모양이 극히 경쾌하고 아름다운 고려 시대의 사찰이다. 부석사의 무량수전은 극락을 상징하고 주관하는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으로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 중 하나이다.신라 문무왕 16년(676) 의상 스님이 왕명으로 창건했다. 의상 스님은 부석사에 자리 잡은 뒤 입적할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경내에는 신라 시대 빛나는 역사와 문화의 향기가 담긴 많은 문화재를 볼 수 있다.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제17호), 무량수전(국보 제18호), 조사당(국보 제19호), 소조 여래좌상(국보 제45호), 조사당벽화(국보 제46호) 등 늘어놓기에도 숨이 가쁠 정도다.무량수전은 1962년 국보 제18호로 지정됐다. 정면 5칸, 측면 3칸, 단층 팔작지붕 주심포계 건물이다. 이곳에는 국보 제45호인 소조 여래좌상이 있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건물 중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더불어 고대 사찰 건축의 구조를 연구하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조사당 앞 선비화도 빼놓을 수 없는 명물이다. 의상 스님의 지팡이가 나무로 자랐다고 하는 전설이 있는 이 나무는 ‘골담초’로도 불린다. 콩과에 속하며 1천300년 이상 된 나무다.역사와 문화, 전통의 향기가 가득한 부석사에 들러 선비화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떨까. 일상에 지쳤던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우리나라 첫 사립 교육기관, 소수서원·선비촌소수서원은 조선 중종 38년(1543)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운 서원의 효시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강학당과 자서각, 일신재 등 건물마다 역사의 깊이가 서려 있고, 충·효·예·학이 살아 숨 쉬는 선비정신의 산실이다. 조선 중·후기에 걸쳐 많은 인재를 배출하면서 학문과 정치의 요람이 됐다.안향초상(국보 제111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보물 제458호) 등 중요한 유물과 각종 전적이 소장돼 있다. 또한 이곳이 통일 신라 시대의 사찰이었음을 알려주는 숙주사지당간지주(보물 제59호) 등 불적이 남아 있는 오랜 역사의 학문, 전통문화를 엿볼 수 있다.소수서원 옆으로는 소수박물관과 선비촌, 선비문화수련원이 나란히 위치해 있다.선비촌은 옛 선비정신을 계승하고, 선현들의 학문 탐구의 장과 전통 생활공간을 재현하기 위해 조성됐다. 우리 고유의 사상과 생활상의 체험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선비의 생활상을 이해할 수 있는 오감체험형 전시와 전통문화 체험의 기회 등 각종 기획프로그램이 다양하게 준비돼 있다. 선비촌에 방문해 옛 선비들의 당시 생활상을 엿보며 잊혀 가는 수준 높은 선비문화와 숨결을 느껴보자.◆사람을 살리는 산, 소백산 국립공원풍기읍 수철리에 있는 소백산은 18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우리 민족의 영산이다. 낙동강과 남한강을 가르며 굽이굽이 골짜기마다 천연의 자연이 살아있다. 우아하고 장중한 능선은 병풍처럼 펼쳐져 한 폭의 산수화를 그려내고 있다.백두대간의 기상을 보여 주면서도 어머니 품과 같이 아늑한 산줄기, 수많은 동·식물과 인간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태백산에서 서남으로 갈린 산맥이 구름 위에 솟아 경상도·강원도·충청도 3도의 경계를 이루면서 서남쪽으로 백여 리를 뻗어 내렸다.소백산의 주봉인 비로봉(1천439m)에는 천연기념물인 주목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 이 고장 선비들이 한양의 궁궐을 향해 임금과 나라의 태평을 기원했다는 국망봉(1천421m), 소백산 천문대가 있는 연화봉(1천394m), 옛날 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는 도솔봉(1천315m) 등 많은 산봉우리가 연 이어져 있다. 소백산 중턱에는 신라 시대 고찰 희방사와 비로사가 있고, 희방사 입구에는 영남 제일의 폭포라는 희방폭포(28m)가 사계절 내내 시원한 물줄기로 찾아오는 이들을 맞이한다.1년에 6개월가량은 흰 눈으로 온통 덮여 있는 비로봉은 ‘한국의 알프스’로 불리기도 한다.수많은 야생화의 보고로 희귀식물인 왜솜다리(에델바이스)가 자생하고 있으며, 봄이면 철쭉이 만개한다.◆선인들의 발자취, 죽령 옛길소백산 허리를 감아 오르는 아흔아홉 굽이의 죽령은 영남의 3대 관문 중 하나다. 그 옛날 과거길 선비들의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경북 영주와 충북 단양을 잇는다.죽령은 삼국시대 한동안 고구려의 국경으로 신라와 대치, 삼국의 군사가 뒤엉켰던 격전장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일어난 수많은 전쟁을 기록한 사료들은 당시 죽령이 얼마나 막중한 요충이었음을 짐작할 만하다.1910년대까지도 경상도 동북지방 여러 고을이 서울 왕래에 모두 이 길을 이용했다고 한다. 청운의 뜻을 품은 선비, 공무를 띈 관원들, 온갖 물산을 유통하는 장사꾼들로 사시장철 번잡했던 이 고갯길은 길손들의 숙식을 위한 객점, 마구간들이 늘어서 있었다.근래 교통수단의 발달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겨 수십 년 숲 덩굴에 묻혀 있던 죽령은 1999년 영남 내륙을 이어온 죽령의 옛 자취를 되살려 보존하려는 뜻에서 희방사역에서 죽령주막까지 1시간 정도(2.5㎞) 걸리는 길을 복원하면서 다시금 세상에 알려졌다. 2007년 명승 제30호로 지정되기도 했다.현재 죽령 옛길은 역사와 전설이 어린 옛 고갯길 일부를 복원한 자연생태로다. 오랫동안 인적이 끊긴 덕분에 식생이 다양하다. 산나무, 물푸레나무, 서어나무 등 온갖 수목과 개별꽃, 피나물 등 형형색색의 야생화가 펼쳐진다. 길을 따라 흐르는 청명한 계곡, 길게 늘어져 있는 수목 터널 주변에 펼쳐진 소백산의 푸른 능선을 마음에 담아보자.◆고즈넉한 여유로움이 감도는 곳, 무섬마을양반마을로 유명한 봉화 닭실마을과 안동 하회마을에 이웃한 양반마을이자 선비마을인 영주 무섬마을은 문수면 수도리에 있는 전통마을이다.무섬마을은 물 위에 떠 있는 섬을 뜻하는 ‘수도리’의 우리말 이름이다. 수도리는 이름 그대로 내성천이 마을의 3면을 감싸 안고 흐르는데, 중국 섬계 지역의 지형과 비슷하다고 해 ‘섬계마을’이라고도 부른다. 무섬마을은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더불어 옛 선비들의 삶까지 엿볼 수 있는 매력적인 곳이다.마을은 휘감아 도는 맑은 강을 따라 은백색 백사장이 반짝이듯 펼쳐진다. 소나무와 사철나무 등이 숲을 이룬 고즈넉한 산들이 강을 감싸 안고 이어져 평화롭고 고요하다.마을의 역사는 16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반남 박씨가 이곳에 처음 터를 잡은 후 선성 김씨가 들어와 박씨 문중과 혼인하면서 오늘날까지 두 집안의 집성촌으로 남아 있다. 40여 가구 전통가옥이 지붕을 맞대고 오순도순 마을을 이룬 무섬마을은 수백 년의 역사와 전통이 남아 있다. 30여 채가 조선 후기 사배 두가 가옥이며, 역사가 100여 년이 넘는 가옥도 16채나 남아 있다.특히 경북 북부지역의 전형적인 양반집 구조인 ‘ㅁ’자형 전통가옥이 늘어서 있는 모습이 장관이라 하겠다. 불과 30년 전까지 마을과 외부를 이어주던 유일한 통로였던 외나무다리가 마을의 대표 상징물로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무섬마을에서는 다양한 축제와 행사, 체험을 할 수 있다. 무섬외나무다리 축제, 정월대보름 달집태우기축제, 무섬문화재 등의 행사가 마련돼 있으며, 전통한옥체험과 무섬문화촌전통문화체험 프로그램도 준비돼 있다.전통한옥체험은 역사와 전통, 자연을 닮은 한옥의 매력을 눈으로 마음껏 감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숙박 체험을 통해 온몸으로 한옥의 정취를 느껴볼 수 있다.◆장욱현 영주시장전 세계가 코로나19라는 전례 없는 재난으로 신음하고 있다. 하지만 국민이 희망을 잃지 않도록 에너지를 북돋아 주고 힘을 보태야 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의무일 것이다. 국민이 잠시나마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힐링’할 수 있는 곳, 영주는 코로나 시대에 더욱 각광받는 관광지라 하겠다.목조건축 양식의 정수라 불리는 부석사와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은 각각 2018년과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면서 그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세계적 수준의 아름다움과 정신문화를 만끽할 수 있다.일찍이 ‘사람을 살리는 산’이라 불리는 소백산 국립공원은 천상에 비견되는 풍광으로 여러분을 맞이할 것이다. 지친 이들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지는 소백산의 넉넉한 품이야말로 위드 코로나 시대 빼놓을 수 없는 관광지다.2021년에는 영주세계풍기인삼엑스포가 열릴 예정이다. ‘선비세상’의 개장도 추진 중이다. 중앙선 복선 전철화 사업과 함께 수도권이 1시간대 거리로 가까워지면 더욱 많은 분이 영주를 찾아 심신을 힐링하고 돌아갈 것으로 기대된다.근대의 향취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근대역사문화거리 등 영주는 새로운 관광자원 개발을 통해 관광객의 다양한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숭고한 선비정신과 인성함양의 도시 영주에서 진정한 힐링의 가치를 느껴보시길 바란다. 이승엽 기자 sylee@idaegu.com

만성 콩팥병…생소하지만 위험한 질환

만성 콩팥병 환자의 수도 크게 늘고 있지만 이 질환의 위험성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우리나라에서 만성 콩팥병으로 진료를 받은 환자는 2017년을 기준으로 20만3천978명이며 해마다 8.7% 증가하고 있다.대한신장학회는 증상이 없는 만성 콩팥병 환자를 포함하면 성인 9명당 1명이 만성 콩팥병을 앓고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이는 콩팥 기능이 떨어지면 피로감을 잘 느끼고 전신 가려움증, 손발이 붓고 혈압이 상승한다.하지만 이러한 증상이 모호해 적절한 검사를 받지 않으면 콩팥 기능이 대부분 없어지는 말기 콩팥병 직전까지 모르고 지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만성 콩팥병, 몸 전체 붕괴만성 콩팥병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우리 몸에서 콩팥이 하는 역할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첫째로 콩팥은 몸의 정수기 역할을 한다.콩팥은 미세한 혈관으로 이뤄져 있는데, 하루에 약 180ℓ의 혈액을 걸러준다.체내 대사과정의 노폐물은 소변을 통해 몸 밖으로 배설시킨다.콩팥은 혈액 성분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역할도 한다.우리 몸의 체액과 전해질, 산성도 등을 항상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이 콩팥의 역할이다.또한 콩팥은 호르몬을 만들고 활성화시켜 적혈구와 비타민D 생성에도 관여한다.이렇게 다양한 일을 하는 콩팥이 그 기능을 제대로 못하게 되면 노폐물이 소변으로 배출되지 못하고 몸 안에 축적돼 두통부터 현기증, 혼수상태까지 유발하는 요독증이 생기는 것이다.부종은 몸 속 체액조절에 문제가 생겨 몸이 붓는 상태이다.빈혈은 혈액을 만드는 조혈호르몬이 잘 생성되지 않아 나타난다.골다공증은 비타민D가 잘 만들어지지 않아 뼈가 약해지는 것.콩팥은 혈압을 유지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콩팥에 문제가 생기면 고혈압이 없던 사람이 고혈압이 생기기도 한다. ◆만성 콩팥병 증상과거에는 만성 신부전이 콩팥 기능이 감소해 회복이 되지 않는 상태, 혹은 투석이 필요한 상태로 흔히 통용됐다.요즘은 콩팥 기능 이상이 생기기 전이라도 3개월 이상 콩팥 이상의 소견이 지속되고 점차 콩팥 기능이 감소하는 상태를 만성 콩팥병으로 정의하고 있다.콩팥의 기능은 ‘사구체여과율’이라는 수치로 측정한다.사구체는 콩팥에 붙어 있는 혈관 꽈리다.따라서 사구체여과율은 혈관 꽈리가 얼마나 노폐물을 걸러낼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수치이다.정상인의 사구체여과율 수치는 90~120㎖/min/1.73㎡ 정도다.90에서 60까지는 콩팥 기능이 약간 저하된 상태며, 60 이하이면 만성 콩팥병으로 진단한다.또 증상에 따라 중등도 기능 감소 상태, 심한 기능 감소 상태, 말기신부전으로 나뉜다.건강한 사람도 사구체여과율은 40세 이후부터 1년에 수치 1씩 떨어진다.고혈압이나 당뇨병이 있으면 수치가 떨어지는 속도가 더 빨라진다.고혈압이 있으면 혈관 내 압력이 높아져 혈관벽이 딱딱해지거나 늘어나며, 당뇨병이 있으면 혈액 속에 당이 많아져 혈관 세포가 손상된다.콩팥은 미세한 혈관 덩어리기 때문에, 혈관이 나빠지는 질환을 가지고 있으면 콩팥도 덩달아 나빠지는 것이다.고혈압 환자 5명 중 1명, 당뇨병 환자 3~4명 중 1명은 만성 콩팥병이 생긴다.만성 콩팥병은 콩팥 손상 정도와 기능의 감소 정도에 따라 5단계로 나누며, 철저히 관리하지 않으면 마지막 단계로까지 악화돼 결국은 투석이나 신장이식과 같은 신장대체요법을 해야 한다. ◆조용히 다가와 생명 위협콩팥은 척추 양측에 한 쌍으로 존재하는 장기이다.대사 노폐물을 배설하고 수분 및 전해질을 조절해, 신체가 항상 일정한 상태로 유지되도록 한다.이외에도 콩팥은 여러 호르몬을 분비하는데, 레닌이라는 물질이 혈압 조절에 관여한다.콩팥에서 생성되는 조혈 호르몬은 골수에서 적혈구의 생성을 촉진시켜 빈혈을 방지하는 작용을 한다.또 비타민D를 활성화시켜 뼈 생성 및 흡수, 신체 내 칼슘과 인산 조절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만성 콩팥병이 생기면 노폐물의 축적으로 피로감, 구역감, 구토, 소양증이 생기고, 몸이 붓고 혈압이 상승한다.혈액이 산성화돼 뼈가 약해지고 영양불량 상태가 올 수 있다.몸속에 인산이 축적되고 칼슘 농도가 떨어지며, 부갑상선 호르몬 분비가 증가되면 뼈 속의 칼슘이 빠져 나와 뼈가 약해지고 혈관은 석회화돼 동맥경화가 촉진된다.이에 따라 심혈관 질환이 증가하고 이는 만성 콩팥병 환자의 중요한 사망 원인이 된다.그러나 이러한 증상과 합병증은 신기능이 심하게 손상 된 후 발견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증상으로 만성 콩팥병을 의심하는 것은 위험하다. 만성 콩팥병 환자는 고혈압, 심장기능부전, 빈혈, 골질환 등의 합병증을 대부분 가지고 있다.투석 중인 20~30대 환자는 100배, 65세 이상인 경우도 10배나 사망률이 높다.만성 콩팥병 환자의 사망 원인의 절반 이상이 뇌출혈이나 뇌경색, 심근경색, 심부전과 심장 급사 등 심장 및 뇌혈관 질환이다.만성 콩팥병 환자는 콩팥병의 치료 뿐아니라 심장 및 뇌 혈관 질환의 예방과 치료가 중요하다. ◆심혈관 질환자 특히 주의우리나라에서 투석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들의 절반은 당뇨병으로 인한 만성콩팥병이다.고혈압이 원인인 경우가 20%, 사구체신염이 1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당뇨병을 가진 환자는 만성 콩팥병의 발생 위험이 일반 인구에 비해 3.5배 높다.나이가 많을수록 만성 콩팥병의 발생 위험이 높아 65세 이상은 발생 위험이 3.2배 증가한다.또 최근에 사회적인 문제가 되는 비만, 인슐린 저항성, 동맥경화를 포함하는 대사증후군을 가진 환자도 만성 콩팥병의 발생 위험이 1.8배 높다.특히 심혈관질환을 가진 환자는 무려 7.9배나 많이 발생한다.고혈압과 당뇨 질환을 앓거나 고령자는 만성 콩팥병 검사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 건강 검진이나 다른 질환으로 검사를 받다가 소변이나 혈액 검사 이상으로 만성 콩팥병이 의심돼 내원하는 환자가 많다.먼저 소변 이상을 확인하는 것이 만성 콩팥병을 조기에 진단하는데 중요하다.소변에 단백뇨나 혈뇨가 지속된다면 만성 콩팥병의 가능성이 아주 높다.만성 콩팥병을 진단하는 가장 좋은 검사는 혈액검사로 콩팥 기능을 나타내는 혈액 내 크레아티닌(신기능검사)과 사구체 여과율을 확인하는 것이다.특히 만성 콩팥병의 주요 원인인 당뇨병과 고혈압 환자, 가족력이 있는 환자는 주기적으로 소변검사와 신기능검사를 해야 조기에 만성 콩팥병을 진단할 수 있다.신장 초음파 검사를 받는 것도 중요하다.특히 당뇨병을 가진 환자는 최근에 혈당 조절이 이상할 만큼 잘 되거나 자주 저혈당에 빠지는 경우, 몸이 붓거나 피로감이 갑자기 심해지고 어지러움, 구역, 구토가 있으면 신기능 검사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혈압 조절이 잘 되지 않거나 갑자기 혈압이 많이 올라가는 경우, 몸이 붓거나 숨이 찬 경우도 만성 콩팥병을 의심해야 한다.◆식생활습관이 좌우만성 콩팥병 장기추적조사 연구에 따르면 비만과 당뇨 등 대사 이상이 있는 경우 혈액 투석이나 이식이 필요한 만기신부전 진행 위험도가 1.53배 증가했다.매일 1갑씩 15년간 흡연한 만성 콩팥병 환자는 비흡연 환자에 비해 콩팥기능 악화 위험도가 1.48배, 30년 이상 흡연한 환자는 1.94배 높았다.1일 소금 섭취량이 11g 이상인 환자는 6~8g 섭취 환자와 비교하면 콩팥기능 악화 위험도가 1.6배 증가했다.만성 콩팥병 관리를 위해서는 저염식을 하고 단백질 섭취와 칼륨이 많은 과일·채소의 지나친 섭취는 피해야 한다.담배는 반드시 끊고 술은 하루에 1~2잔 이하로 줄여야 하며 적정 체중을 유지해야 한다.주 3일 이상 30분~1시간 적절한 운동을 하고 콩팥의 상태에 따라 적절한 수분을 섭취한다.고혈압과 당뇨를 꾸준히 치료하고 정기적으로 소변 단백뇨와 혈액 크레아티닌 검사를 하는 것이 좋다. 도움말=계명대 동산병원 신장내과 한승엽 교수이동률 기자 leedr@idaegu.com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영천 자천교회

경북 영천 화북면에는 우리나라 초기 교회 모습을 간직한 교회가 있다.바로 ‘자천교회’다.자천교회가 위치한 화북면은 태백산맥의 준봉인 보현산을 끼고 이로부터 발원한 횡계천과 고현천이 흐르고 있어 예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자연 환경을 가지고 있다.현재 젊은이들이 다 떠나간 후 대부분 어르신들이 살고 있지만 과거에는 번성한 마을 중 하나였다.자천교회를 조그마한 시골 동네에 있는 교회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천교회는 우리나라 초기 교회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전국은 물론 해외에서도 이곳을 찾는다.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전에는 1년에 3만여 명에 가까운 국민들이 찾았다.특히 자천교회를 설립한 권헌중(1865~1925) 장로에 대한 이야기는 각박해지고 있는 시대에 꼭 필요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자천교회 시작, 그리고 과거와 현재영천 화북면 보현산 자락에 있는 자천교회는 미국 북 장로교에서 파송된 제임스 아담스(안의와)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인 권헌중 장로가 세운 교회다.제임스 아담스 선교사는 1895년 한국에 입국한 후 대구·경북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펼쳤다. 1898년 4월 전도차 대구에서 영천을 거쳐 청송으로 순회하던 중 영천과 청송의 경계 지점인 노귀재에서 권헌중을 만나 선교했다. 같은해 10월 권헌중이 화북면 자천동의 초가삼간을 구입해 서당 겸 기도소로 사용하면서 자천교회의 역사는 시작됐다.이후 교회가 조금씩 번성하게 되자 권헌중 장로는 좀 더 큰 예배당의 필요성을 깨닫고 자신의 사재를 들여 1904년 현재의 16칸 목조건물의 예배당을 완공했다.이렇게 시작된 자천교회는 예배당 건축 이후 마을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 나갔다.교회의 본질적인 사명 외에 나라와 민족을 위한 교회의 사회적인 역할을 함께 펼쳤다.권헌중 목사는 암울한 민족의 미래를 밝혀나가기 위해 교육 사업에 힘을 쏟았다. 구식인 서당 교육을 벗어나 신식 교육의 필요성을 느낀 권 목사는 선교사들이 실시한 근대식 학교 교육 제도를 도입해 자천교회 예배당에 ‘신성학교’라는 2년제 소학교를 설립했다. 주일학교가 아닌 교회학교로서 근대식 공교육의 현장이었다.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의 수탈이 이어지면서 자천교회 또한 어려움에 직면했다.자천교회의 대들보였던 권헌중 장로가 1925년 별세해 교회의 앞날은 더욱 암담했다. 그러나 1930년대 이르러 도회지에서 전입해 온 양재황, 이복조 부부의 헌신으로 활기를 되찾았다.일제가 대동아전쟁에 광분해 전쟁 물자를 공급하고자 전국에 걸쳐 잔혹한 수탈을 자행한 당시 자천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교회의 귀중한 종이 공출 당하기도 했으며 일제가 예배당에 가마니를 생산하는 공장을 만들어 교인들의 노동력을 착취했다.일제의 핍박을 버틴 자천교회는 광복을 맞아 교회 재건에 힘썼다.하지만 좌우 이념 대립으로 피해를 받았다.대구 10·1사건 여파가 영천 자천리 마을까지 전해졌다.좌익 가담자들이 준동해 우익 인사들에게 해를 가했고 그 과정에서 자천교회 부속 건물이 전소되는 등 피해를 입었다.6·25전 발발 후 얼마 되지 않아 영천이 북한군의 점령지가 되자 자천교회 예배당은 북한군 사무실로 사용되기도 했다.북한군에 대한 미 공군의 폭격으로 예배당이 파손될 위기에 처했을 때 교인들이 예배당 지붕에 하얀 횟가루로 ‘CHURCH’라고 표시해 예배당을 보존한 일화는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져 오고 있다. ◆권헌중의 노블리스 오블리주자천교회를 세운 권헌중 장로의 인생은 파란만장하다. 오롯이 나라와 지역민을 위해 일생을 보냈다.그는 경주에서 서당훈장을 지냈다.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자 의병으로 활동을 했다. 의병활동의 전력 때문에 일제의 감시를 피해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녔다. 청송과 영천의 경계가 되는 노귀재를 넘던 중 아담스 선교사를 만나 복음을 받아들였고 대구로 가고자 했던 계획을 취소하고 지금의 영천 화북면 자천리에 정착했다.이곳에 교회를 세우려고 하니 자천리 주민의 반발이 심했다.당시 선교사들에 의해 기독교, 천주교가 들어오고 있었지만 여전히 시골 마을에서는 유교적 가치관이 완고했던 터라 “우리 마을에 야소교가 웬 말이냐”며 반대에 부딪쳤다.이에 권 장로는 당시 마을이 꽤 번성해 주재소와 면사무소가 있음에도 제대로 된 건물이 없음을 간파하고 “내가 마을에 주재소와 면사무소 건물을 지어 줄 테니 교회를 세우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제의했다.결국 마을로부터 교회 설립을 허락받은 권헌중 장로는 초가삼간 한 채를 구입해 서당을 겸한 교회를 시작하게 됐다.기도처처럼 교회를 시작하다 보니 서당 겸 가정교회로 출발했다.교인이 늘기 시작하자 예배당 역시 사재를 털어 지었다. 애초 교육자, 민족의식을 가졌던 권 장로는 ‘신성학교’를 세웠다. 1913년 1회 입학생을 모집했는데 당시 50명이 모였다. 이중 여학생은 단 1명이었는데 자신의 딸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가정에서 “계집아이 글 가르쳐서 뭐하느냐”며 딸자식을 보내지 않자 권헌중 장로가 주민들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솔선수범했다.이후 학교가 마을에 긍정적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마을 주민의 인식이 바뀌기 시작, 여학생들도 하나 둘씩 늘어나게 됐다.자천교회는 선교사가 재정적 지원을 해준 교회가 아니다 보니 권 장로의 고심은 깊어져 갔다. 교회에 빚이 생기자 권헌중 장로는 자신의 논밭을 팔아서 빚을 갚았다. 자기 살던 집을 담보로 잡혀 있었고 결국 다른사람에게 넘어갔다. 현재 자천교회 부지는 예배당과 전국에서 유일한 전통 한옥 교육관인 신성학당(새별배움터)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신성학당이 있던 부지는 영천의 한 재력가에게 넘어가면서 예배당과 신성학당은 돌담으로 단절돼 있었다. 권헌중 장로의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마음이 통했을까.2007년 신성학당 부지의 주인의 아들이 교회에 기증을 했고 초창기 교회 터 일대 모습을 되찾을 수 있게 됐다.과거 권헌중 장로가 살았던 곳이자 재력가가 살았던 이 집은 오늘날 신성학당으로 재탄생됐고 이곳에서 전국 유일무이한 ‘처치스테이’가 진행되고 있다. ◆개신교 초기 한옥 예배당자천교회의 역사적 가치는 독특한 예배당 구조를 들여다보면 한 눈에 알 수 있다.자천교회 예배당은 전국적으로 몇 안 되는 개신교 초기 한옥 예배당으로서 독특한 ‘ㅡ자형’ 구조를 가졌다. 한국 교회의 전통적인 한옥 예배당은 ‘ㄱ자형’, ‘정방형’, ‘장방형’ 등의 형태가 일반적이다.자천교회는 똑같은 장방형 집 두 채를 나란히 ‘ㅡ자형’으로 배치한 겹집 양식이다.‘ㅡ자형’ 겹집 구조로 독특한 지붕 모양을 갖게 됐다. 자천교회의 지붕은 아주 짧은 용마루를 가진 ‘우진각’ 형태로서 이는 전후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모양이다.자천교회 지붕이 극단적으로 짧은 용마루를 갖게 된 원인은 내부의 종도리(상량)가 활처럼 굽은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종도리는 일직선으로 곧게 돼 있으나 자천교회 예배당은 종보 위에 동자기둥을 세우고 이를 연결점으로 해 종도리를 활처럼 굽게 했다.겹집 구조는 넓고 높은 지붕을 갖게 했다. 따라서 지붕의 하중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고 이를 지탱하기 위해 서까래를 촘촘하게 깔았으며 실내에 기둥 4개를 세웠다.이 기둥들을 자세히 보면 선인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중앙의 기둥 열을 따르면 강대상에도 수직 기둥이 있어야 하지만 이를 아치형의 기둥으로 대신해 강대상 공간을 자연스럽게 확보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또 초기 한국 교회 예배당의 칸막이는 대부분 천으로 휘장을 쳐 남녀를 구분했지만 자천교회는 나무 칸막이를 설치했다. 그 이유는 중앙의 기둥들 때문에 휘장을 치는 것에 방해가 되므로 기둥과 기둥 사이를 나무로 잇대어 칸막이로 사용했던 것이다. 그리고 회중석에 앉아서 보면 벽처럼 높은 칸막이 때문에 답답함을 느낄 수 있지만 강대상의 중앙에서 보면 칸막이는 기둥에 가려 보이질 않아 설교자는 마치 열린 공간에서 설교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분리된 남녀 공간이 완전히 대칭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자천교회 예배당 건축의 또 다른 특징 하나는 투박하지만 지극히 서민적이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한옥 예배당 가운데 제일 오래되고 고급스런 성공회 강화읍성당 예배당(1900년 건축)과 견줘볼 만하다.자천교회는 시골 목수의 세련되지 못한 솜씨와 인근 보현산에서 난 목재를 가지고 나무 모양 그대로 투박하게 지었지만 나름대로 많은 지혜를 발휘한 흔적들이 보인다. 그 한 예로 예배당 안 뒤편에 온돌방을 좌우 대칭으로 배치하고 들문을 달아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아늑함을 표현했다.자천교회 예배당의 건축 양식과 기법들은 예배당은 물론 일반 한옥 구조물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독특한 특징들이 있어 교회사적, 건축사적으로 상당한 의미가 있다.하지만 아쉬운 점은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뛰어남에도 아직까지 국가지정문화재로 등재되지 못한 채 경북도 문화재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전 세대가 남긴 신앙의 역사적 유산은 유형의 것과 무형의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예배당과 같은 건축물을 비롯해 서적 등을 말하며 후자는 과거 믿음의 선진들로부터 오늘의 우리들에게 전하는 신앙 삶, 정신, 운동이라 할 수 있겠다.그런 점에서 자천교회는 유형과 무형을 모두 갖춘 유산이다. 이미 한국 교회에서 자천 교회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개신교의 초입 이래 토착화로부터 시작해서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가 뿌리를 내리는 전 과정의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경북도를 비롯해 영천시에서 많은 관심으로 오늘날의 자천교회 모습이 지속되고 있지만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인다면 경북을 넘어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유산으로 거듭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신헌호 기자 shh24@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89) 천룡사

경주 남산 중턱에 위치한 천룡사는 창설에서부터 부처의 공덕까지 다양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 신라 유명사찰이다.최근 사찰터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천룡사라는 글이 적힌 기와조각이 발견돼 천룡사의 존재는 분명하게 확인됐다. 또 천룡사 터에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을 복원하고, 주변에 흩어져 있는 석탑과 건축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당시 석재들을 많이 모아두고 있다.그러나 여전히 많은 석재들이 절터 주변에 많이 흩어져 있다.특히 대형 석조는 발굴되었지만 절터 마당 한구석 땅속에 묻혀있어 아는 사람의 설명이 없으면 찾아볼 수도 없다. 신라시대 당나라의 장수 악붕구가 사신으로 왔다가 천룡사가 무너지면 신라는 며칠 내로 멸망에 이를 것이라고 예언할 정도로 천룡사는 대내외적으로 무게감이 컸던 중요 사찰로 전해진다. 그렇지만 아직 석탑 복원 이외에는 이렇다 할 정비복원사업이 진행되지 않을 뿐 아니라 계획조차 수립되지 않고 있어 사학자들의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만 메아리로 울리고 있다. ◆삼국유사: 천룡사경주의 남산 남쪽에 봉우리 하나가 우뚝 솟아 있는데 세상에서는 고위산이라 한다. 산의 남쪽에 절이 있는데 세속에서는 고사 또는 천룡사라고 한다. 토론삼한집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계림 땅 안에는 딴 곳에서 발원해 흘러들어온 강물이 두 줄기가 있고 거슬러 오르는 강물 한 줄기가 있다. 그 역수와 객수의 두 근원이 하늘의 재앙을 진압하지 못하면 천룡사가 뒤집혀 무너져 앉는 재앙이 있게 되리라.’ 또 세속에는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역수란 것은 고을의 남쪽 마등오촌의 남쪽을 흐르는 시내가 바로 이것이다. 또 이 물의 근원이 천룡사로 돼 있다.’중국의 사신 악붕구가 와서 보고 말하기를 “이 절이 파괴되면 며칠 못 가서 나라가 망할 것이다”라 했다. 또 다음과 같이 서로 전하는 말이 있다.옛날에 한 신자의 집에 천녀와 용녀라는 두 딸이 있었다.부모가 두 딸을 위해서 절을 지으니 절의 이름은 여기서 연유한다. 천룡사는 경내가 신이해 불도의 성취를 돕는 곳인데 신라 말에 피폐해 허물어진 지 오래됐다.중생사의 관음보살이 젖을 먹여 기른 최은함의 아들이 승로인데 승로가 숙을 낳고, 숙이 시중 제안을 낳았다.제안이 바로 허물어진 절을 중수하여 일으켰다. 그리고 석가만일 도량을 설치해 조정의 뜻을 받아들였다. 겸해 그의 기록과 발원문을 절에 남겨 두었다.그는 죽어서 절을 지키는 신이 되어 자못 신령스럽고 신이한 일들을 많이 나타내었다.절에 남긴 기록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단월 내사시랑 동 내사문화평장사 주국 최제안이 글을 쓴다.경주 고위산 천룡사가 피폐하여 허물어진 지 여러 해가 되었다.제자가 특별히 임금님의 만수무강과 백성과 나라가 평안하고 태평하기를 발원해서 불전, 불당, 회랑, 전각, 방, 숙소, 주방, 창고 등의 공사를 일으켜 다 마쳤다.돌과 흙으로 빚어 여러 구의 부처를 만들고 석가만일도량을 개설했다. 이미 나라를 위해 중수했으니 관청에서 주지를 임명하는 것도 좋으나 사람이 갈려 교대를 할 때에는 도량의 승려들이 안심할 수가 없다. 곁에서 보건대 시주받은 전답으로 절의 경비를 충족한 것을 보면, 팔공산의 지장사 같은 곳은 들어온 전답이 200결이고, 비슬산 도선사는 들어온 전답이 20결이며, 서경의 사면에 있는 산사들도 각각 20결씩이다.이들 절에서는 모두 직책이 있고 없음을 막론하고 반드시 계율을 갖추고 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뽑아서 절에서 여러 사람이 원하는 것에 따라서 여러 차례 주지를 시켜 분향의 예를 올리고 수도하는 것을 변하지 않는 규칙으로 삼았다. 제자는 이 풍습을 듣고 기뻐해 우리 천룡사도 역시 절의 여러 스님 중에서 재주와 덕망이 함께 뛰어난 큰스님으로 기둥이 될 만한 사람을 뽑아 주지로 임명해 길이 분향 수도하려 한다.문자로 자세히 기록해 행사 책임자에게 맡기니 이번 주지부터 시행할 것이며, 유수관이 문서를 받아 도량의 여러 스님에게 보일 것이니 각자 자세히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중희 9년(1040) 6월 관직을 갖추어 앞의 것과 같이 서명했다.살펴보면 중희는 곧 거란 홍종의 연호이니, 고려 정종 6년 경진(1040)이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천룡사의 붕괴천룡사는 신라시대 남산 중허리 한적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누가 언제 무엇을 위해 창건했는지 인근 지역 주민들도 절의 내력을 모른다. 더욱 신비스런 것은 주지스님의 행적이다. 천룡사의 주지스님은 분위기부터 묘하다. 남산에서 자생하는 나무, 갈대 등의 초목 껍질을 벗겨 얼기설기 기워서 만든 옷으로 사시사철 장삼으로 걸치고 다닌다. 그가 쓰는 모자는 24시간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마치 풀잎처럼 머리 위를 덮고 있어 산속을 거닐 때면 그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의 행동이 자연의 일부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의 얼굴은 눈과 코를 제외하고 수염이 뒤덮어 가슴까지 드리워져 있다. 염불을 외거나 밥을 먹을 때도 그의 입술은 수염에 가려 볼 수 없다. 그는 밥 먹을 때와 염불할 때 외에는 좀체 입을 열지 않는다. 입이 무거워 묵언스님으로도 불리며, 고위산 아래 홀로 다닌다 해 고독스님으로 통한다. 절을 찾는 신도들은 편한대로 묵언, 고독스님 등 그때그때 부르는 사람마다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른다. 스님은 호칭에 대해서도 일절 토를 달지 않는다. 스님의 나이도 모른다.언제부터 천룡사에 주석하고 있는지조차 인근 마을의 주민들도 모른다.일설에는 스님의 나이는 백살이 훨씬 넘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고독스님은 가끔씩 엉뚱한 예지력을 발휘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이 때문에 현실이 답답하거나, 큰 사업을 하기 전에 충고를 얻기 위해 천룡사를 찾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법당은 신도들보다 찾아오는 손님들로 늘 북적거렸다. 천룡사에 신도와 방문객들이 늘어나기 전에는 아무도 찾지 않는 법당에 스님이 혼자 부처님 앞에서 염불만 하고 탁발을 하지 않았다.찾아와 시주하는 이도 없고, 스님이 농사도 짓지 않았으나 쌀독에는 늘 쌀이 가득했다. 또 마당 한가운데 놓인 큰 석조에는 샘을 파지 않아도 항상 깨끗한 물이 찰방찰방 넘치도록 가득했다.아무리 많은 손님들이 퍼마셔도 석조의 물은 항상 넘쳐흘렀다. 어떤 이는 생명수라고 하며 매일 석조의 물을 퍼마시고 떠갔다. 나라에 변고가 생길 때면 천룡사에서 먼저 이상 징후가 나타났다.문무왕이 죽기 전날 천룡사 불상이 소리 내어 울며 눈물을 흘려 법당이 흥건했다.또 원성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천룡사 삼층석탑이 와글와글 소리 내며 흔들리다가 3층 이상의 모든 석재가 무너져내렸다. 이러한 변고는 주지스님 뿐 아니라 천룡사를 찾아왔던 신도들과 방문객들이 함께 경험하고, 지켜보았기 때문에 순식간에 고을마다 소문이 번져 복을 빌기 위해 찾는 발길이 물밀 듯 밀려들었다. 천룡사의 신비스런 사실들이 전해지면서 나라에서도 절을 경영하는데 필요한 쌀을 비롯한 모든 경비를 지원하면서 왕실의 복운과 나라의 평화를 기원하도록 했다.또 왕은 고독스님을 국사로 초빙했지만 응하지 않고 오직 천룡사에서만 불법을 강의했다. 신라 55대 경애왕이 즉위할 즈음을 전후해 천룡사는 수시로 천둥소리를 내며 울었다.나라에 큰일이 벌어질 것을 걱정해 짐을 싸 피난 갈 준비를 하는 백성들이 생길 정도였다. 이러한 소문은 왕실에도 전해졌지만 경애왕은 귓등으로 듣고 별다른 대책을 강구하지 않았다. 후백제 견훤이 군사들을 이끌고 영천지역까지 내려와 주둔할 때, 신라왕경으로 공격을 개시하기 정확하게 3일 전, 천룡사는 천둥치는 소리로 크게 울다가 기둥이 하나도 남지 않고 폭삭 쓰러져 붕괴됐다. 신비스런 것은 마을사람들과 신도, 방문객들이 무너진 금당을 정비하는데 불상도 없고, 묵언스님도 흔적없이 사라지고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이후 어디에서도 묵언스님을 본 사람은 없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대구·경북 고교총동창회 (44) 문경 문창고

‘돈달산에 힘차게 메아리치는, 배움의 우렁찬 젊은 목소리, 사람 된 참된 길 갈고 닦아서, 겨레를 밝히는 등불이 되자, 우정과 낭만의 수를 놓으며, 축복된 오늘의 꽃을 피우는, 우리의 보금자리 마음의 고향, 길이길이 빛나리 문창고교.’문경의 문창고등학교는 올해로 개교 50주년을 맞았다.인간이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인 인(仁), 의(義), 예(礼), 지(智), 신(信)의 근본이며, 백행의 원천으로 인간 존엄성의 근간이자 건전한 자아실현의 원동력인 ‘지성(至誠)’이 문창고의 교훈이다.온 누리에 비춰나갈 등불이 되는 동량들이 돈달산 자락에서 청운의 꿈을 키워나가는 곳이기도 하다.박목월 작사, 김동진 작곡의 교가는 지난 2월 졸업한 47회 졸업생까지 1만5천255명의 동문에게 아름답고 정감 어린 메아리로 번지고 있다. ◆학생 행복한 성장 위한 교육활동으로 인재 양성 문창고는 명실공히 문경의 명문사학이다.2020년 현재 서울대 진학자 58명에 달하는 문창고는 개교 이후 첫 졸업생을 배출하면서부터 탄탄한 교육과정으로 지역 교육을 선도하는 학교로 주목받기 시작했다.“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강하다”라는 말처럼 문창고는 학생들의 행복한 성장을 가꾸기 위한 활발한 교육활동을 펼쳐오고 있다.이 같은 노력으로 문창고는 △1982년 경북교육청 지정 영어과 지정( 2년) △1996년 〃 학력관리중심학교 △1997년 〃 교육과정운영 선도학교(2년) △1999년과 2001년 〃 수준별 교육과정 운영 지역 중심학교 △2002년 〃 학교평가 우수교 △2006년 〃과학교육실적 우수교 △2009년 학교평가 우수교, 교육과학부 지정 자율학교(5년)로 선정되는 등 학생들의 학력증진을 꾀하고 있다. ◆모교사랑 남다른 문창고 총 동문회문창고 총동창회는 1회 졸업생인 이창효(1대)·이종원(2대)·조희욱(3대)·황경연(4대)·박성희(5대)동문과 2회 졸업생인 이강복(6대)· 김한봉(7대)동문이 회장을 맡아 총동창회의 초석을 다졌다.이후 3회 졸업생인 김양호(8대)·이종수(9대)동문, 6회 졸업생인 박영주(10대)에 이어 현재 문덕배(11대)동문이 바톤을 이어받아 모교와 동문, 모교와 지역사회의 가교 역할을 맡고 있다.특히 모교 발전과 자라나는 후배들을 위한 사랑은 남다르다. 5대 박성희 회장 주축으로 이사를 자처했던 이강복·김한봉 회장 등이 조력자 역할을 맡은 장학회 설립 추진위의 노력과 동문들의 후배들을 위한 모교사랑은 2004년 동창회장학기금 1억 원 달성한 이후 8년 만에 2012년 총 기금 4억7천만 원으로 문창고 총동창회 장학회를 설립하는 성과를 거뒀다.이 같은 모교사랑은 후배들에게 장학금으로 전달되고 있다.최근에는 서울대 문창고 동문회인 서창회(회장 권경일·13회)에서도 장학금을 전달하는 등 후배들의 꿈을 돕고 있다.문창고 총동창회는 다양한 기념사업을 통해 모교를 후원해 왔다.문창고 총동창회는 학교 내에 두 개의 꿈터를 기념 상징물로 제작해 학교에 기증했다.학생들이 꿈터에서 자긍심과 진취적인 기상을 갖고, 세계 어느 곳에 나가서도 활약할 수 있는 글로벌 인재가 되는 꿈을 키우라는 바람으로 두 개의 꿈터를 조성했다.이 꿈터는 2009년 문창고 1회 졸업생인 라톤코리아의 신상용 사장과 16회 졸업생인 도예가 홍진식씨가 기부해 조성됐다. ◆인재산실의 요람 문창고 동문들은 오랜 세월동안 지역 최고의 명문 사학으로 우뚝 설 수 있는 저력과 단합된 힘을 보여주고 있는 만큼 자부심도 대단하다.오랜 역사만큼이나 사시 12명, 행시 4명, CPA 13명, 군 장성 2명 등의 인재를 배출하는 등 우리나라는 물론 지역사회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동문이 많다.문창고 홈페이지에는 올해만 △황석현(38회)동문 변호사 시험 합격 △조성원(46회)동문 일본 동경의과대학에 합격 △천흥수 동문 서원대 행정부총장 취임 △김경식(13회)동문 도자기 장인 선정 △안동현(17회)·김우태(18회)동문 총경승진 등 동문들의 활약상이 담긴 소식만 해도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다. 김학홍 행정안전부 이사관(12회), 법조계에서는 안동지청장을 역임한 최종무 부산서부지청 최종무(18회)형사1부장이 문창고 동문이다.공군사관학교 출신의 김정태(12회), 남완수(14회)동문은 공군 장성으로 복무 중이다.2018년 3D 프린터로 만든 가슴뼈를 제작해 국내 첫 이식에 성공시킨 주역인 김건희(23회)한국생산기술연구원 적층성형가공그룹 수석연구원이 문창고 출신이다.지역에서는 이정걸 문경시의원(6회), 이창수 문경소방서장(6회), 최동성 현, 세계태권도연맹 태권도 시범단 총감독(13회) 등의 동문이 지역사회를 위해 열과 성을 다하고 있다. ◆문창고 문덕배 총동창회장“동문들의 화합과 소통이 가장 우선입니다.”문덕배 총동창회장은 “동문들 간 소통을 강화하고, 문창고가 지역사회와 함께 발전할 수 있도록 집행부의 역량을 집중해 나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문 회장은 “문창고는 서울뿐 아니라 전국 어느 지역의 학교에도 뒤지지 않는 명문 중의 명문으로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면서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곳곳에서 활약하는 동문들의 명예를 지키며 성장하는 사학의 요람이 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문 회장은 “모교가 발전하면 지역사회에 우수한 인재가 유입돼 결국은 지역사회도 동반성장하게 된다”며 “모교가 좀 더 우수한 교육기관으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총동창회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문 회장은 명문사학인 문창고가 지역사회 교육기관으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만큼 총동창회도 그에 걸맞는 지원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이를 위해서는 동문들 간 교류가 특히 중요하다는 판단이다.동문들 간 소통이 활성화돼야만 모교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기 때문이다.그런 만큼 총 동창회를 위한 포부도 잊지 않았다.그는 “문창고 동창회의 장점은 단단하고 끈끈한 결속력”이라며 “선후배가 함께 어울릴 수 있도록 총동창회는 연결고리가 되겠다”고 말했다.문덕배 회장은 “같은 문(門)을 드나들며 배우고, 같은 창(窓)을 통해 세상을 바라봤던 동문과 동창의 의미를 되새기며 지역사회와 함께 소통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김형규 기자 kimmark@idaegu.com

대장암과 다른 직장암

서구화된 음식과 생활습관의 변화로 대장암은 국내에서 2번째로 많이 발생하는 암이다.2019년에 발표된 중앙암등록본부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2017년에만 23만2천255건의 암이 발생했는데, 그중 대장암은 남녀를 합쳐 2만8천111건으로 전체의 12.1%를 차지하며 2위를 기록했다.그중 직장암은 남녀를 합쳐 1만1천385건으로 전체의 4.9%를 차지하고, 남여의 성비는 1.7대 1로 남자에게 더 많이 발생했다. 대장은 충수, 맹장, 결장, 직장과 항문관으로 나눈다. 결장은 다시 상행결장, 횡행결장, 하행결장, 에스결장으로 구분한다.직장은 대장의 마지막 부분으로 길이는 약 15㎝이며 편의상 상부(항문연 12㎝ 이상), 중부(항문연 6~12㎝) 및 하부(항문연 6㎝ 이하)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장암이란 결장과 직장에 생기는 악성 종양이다.발생 위치에 따라 결장에 생기면 결장암, 직장에 생기면 직장암이라고 하며, 이를 통칭해 대장암 혹은 결장직장암이라고 한다. ◆직장암의 증상과 진단 직장암은 증상, 진단, 치료방법과 예후에서 결장암과 차이가 있다.직장암도 결장암과 마찬가지로 선암이 가장 많이 발생하고 선암의 대부분은 선종이라는 양성종양이 진행되어 발생한다.하지만 직장에는 신경내분비종양(유암종)이 다른 대장에서 보다 잘 생긴다.또 직장에는 악성 림프종 및 평활근육종, 위장관간질성 종양이 드물게 발생한다. 직장암도 결장암처럼 초기에는 대부분 아무런 증상이 없어 증상이 나타날 때에는 이미 상당히 진행됐을 경우가 많다.결장암의 증상은 식욕감퇴, 소화불량, 빈혈, 체중감소 등이다.반면 직장암은 진행 정도에 따라 변에 피가 섞여 나오는 증상이 가장 흔하게 나타난다.물론 변에 피가 나오는 경우는 주로 양성 항문질환이 원인이다.하지만 50세 이상에서 항문에 피가 섞여 나오면 검진을 통해 확인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직장암의 다른 증상으로 배변 습관의 변화가 있으며, 변비가 심해지거나 설사를 동반할 수 있다.배변 후에 대변이 남아있는 듯한 느낌이 들 수 있고, 약간의 통증을 느낄 수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말기가 될 때까지 통증이 없다.직장암이 특이한 증상을 보이는 이유는 직장의 위치가 항문에서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이다. 직장암은 항문에 가깝기 때문에 약 75%가 직장의 수지 검사만으로도 암 여부를 진단할 수 있다.물론 확진을 위해서는 내시경적 조직검사가 필요하고, 다른 장기의 침범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전산화단층촬영(CT), 양전자방출단층촬영(PET)이 필요하다.또 결장암 진단에서 잘 시행하지 않는 직장초음파 검사, 자기공명영상(MRI) 검사를 추가로 받기도 한다. 직장암은 해부학적으로 주변에 다른 장기가 가까이 있으며, 직장에는 복막이 없어서 결장암보다 주위 장기로의 암세포의 침윤 및 국소 재발이 많다.따라서 직장암 치료에서는 여러가지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 특히 하부 직장암이라면 항문 괄약근 기능보존이 중요하다.환자들이 ‘항문을 살릴 수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 제일 먼저 걱정을 많이 한다.최근에는 항문을 보존하는 추세로 치료방법이 많이 바뀌고 있다.과거에는 직장암 수술의 경우 항문을 없애고 인공 항문(장루)을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다행히도 방사선 치료, 수술 치료, 특히 복강경과 로봇수술의 발전으로 암세포가 항문 괄약근을 침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영구적 인공항문을 만드는 경우는 드물다. ◆직장암 치료와 수술 방법 직장암 치료에서 국소재발과 항문 괄약근 보존을 위해 수술 전 방사선 치료와 항암 치료를 먼저 시행하는 경우가 많다.수술 전 6주간 방사선 치료를 받고 그 기간 동안 약이나 주사 형태로 항암 치료를 함께 한다.결장암에서는 방사선 치료에 대한 효과는 현재까지 근거가 미약해 잘 시행하지 않는다. 직장암도 다른 대장암과 같이 조기 발견된 경우 내시경적 절제술을 시행해 완치를 할 수 있다.특히 직장이 항문에서 가깝기 때문에 내시경적 절제술을 시행하는 경우 결장암의 내시경적 절제술보다 기술적으로 용이한 점이 있다.또 항문을 통한 외과적 절제술도 가능하다는 차이점이 있다. 진행성 직장암 수술 시에는 다른 대장암과 다르게 주변 장기와 가까이 있는 해부학적 구조 때문에 자율신경 보존에 유의하면서 수술을 해야 한다.수술 후 성기능, 배뇨기능 장애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좁은 골반에서 암의 완전절제와 자율신경과 괄약근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복강경수술과 로봇 수술의 장점이 일반 대장암 보다 더 절실히 필요하다. 로봇 직장암 수술의 경우 현재까지 보험이 인정되지 않아 비용적인 면에서 단점이 있다.그러나 직장암에서는 복강경 수술의 단점들을 극복하고, 수술 후 성기능, 배변 기능,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이 돼 많이 시행되는 편이다.직장암 로봇 수술의 장점은 수술 공간과 시야확보가 용이하고, 3D 고화질의 영상으로 수술 부위를 볼 수 있다는 것.100% 의사의 통제 하에 움직이며 손 떨림이 없어서 미세하고 정교한 수술이 가능하다.또 통증과 출혈이 적고, 빠른 회복으로 입원 기간이 짧고 일상생활로의 복귀가 빨라 환자의 만족도가 높다.특히 최근에는 로봇 단일공 수술도 시행되고 있다.배꼽 주변 2.5㎝ 미만의 하나의 구멍에 로봇 기구를 삽입해 시행하는 수술이다.통증이 적고 흉터가 거의 남지 않는다. 직장암의 사망률은 계속 감소하고 있다.초기에는 다른 대장암보다 치료성적이 좋지 않았지만 지금은 여러가지 전략적 치료의 도움으로 직장암 치료성적이 대장암 치료 성적보다 우수하다.조기에 발견되는 경우가 점차 늘어나고 치료법이 발전했기 때문이다.현재까지는 수술적 치료가 가장 기본적인 치료법으로 통한다.치료율을 높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조기에 발견해 수술적 치료를 받는 것이다.아주 초기에 발견하면 직장을 자르지 않고 내시경으로도 국소 절제할 수 있다.조금 더 진행한 조기 직장암의 경우도 복강경 수술, 로봇 수술 등의 방법으로 과거보다 환자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 직장암이 아예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1차적 예방은 현재의 의학기술로는 거의 불가능하다.발생 원인을 한 가지로 단정 지을 수 없으며, 직장암의 여러 원인 중에는 유전적 및 가족적 요인들과 같이 우리가 선택하거나 피해갈 수 없는 것들도 있기 때문이다.따라서 정기적인 검사를 통해 직장암을 조기에 발견해 치료하는 2차 예방이 가장 중요하다. 도움말=계명대 동산병원 대장항문외과 백성규 교수이동률 기자 leedr@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88) 남월산 감산사

감산사는 경주시가지에서 울산으로 가는 7번국도로 30여 분 달리는 거리에 위치해 있다. 원성왕릉의 동북쪽 1㎞ 정도 가깝게 연접해 있다.왕족이 부모님을 비롯해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들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719년에 세운 절이다. 특히 이 절터에서 발견된 미륵불과 아미타불은 뒷면에 불상과 절을 지은 배경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또 조성연도를 기록한 유일한 불상으로 예술적 작품성이 뛰어나며 당시 사회상을 이해하고 문화를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지금 감산사 대적광전에는 훼손된 모습을 복원한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협시불도 없이 혼자 앉아 있다.대적광전 뒤뜰에는 2층과 3층의 몸돌이 사라진 신라시대 전형적인 형식을 갖춘 삼층석탑이 복원되어 왕실의 복을 빌었던 존엄을 고고하게 증언하고 있다. ◆삼국유사: 남월산 감산사 감산사는 서울(지금의 경주)에서 동남쪽으로 20리쯤 되는 곳에 있다. 금당의 주 부처인 미륵존상의 화광 후면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개원 7년 기미(719) 2월15일에 벼슬이 중아찬인 김지성이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일길찬과 돌아가신 어머니 관초리부인을 위해 공경스런 마음으로 감산사 절 한 채와 석미륵 하나를 만들었다. 아울러 개원이찬과 아우 양성소사와 현도법사와 누이 고파리, 전처 고로리와 후처 아호리 및 서형 급한일길찬과 일당살찬, 총민 대사와 누이동생 수힐매리 등을 위해 좋은 일에 앞장섰다.어머니 관초리 부인이 고인이 되자 동해 흔지가에 뼈를 뿌렸다. 미타불의 광배 뒷면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중아찬 김지전은 일찍이 상사봉어와 집사시랑으로 있다가 67세에 벼슬을 그만두고 한가히 지내면서 나라의 주인인 대왕과 이찬 개원, 그리고 돌아가신 아버지인 인장일길찬과 돌아가신 어머니, 죽은 아우, 소사 양성, 사문 현도, 죽은 처 고로리, 죽은 누이 고파리, 그리고 처 아호리 등을 위하여 감산의 농장을 희사하여 절을 세웠다. 또 돌로써 미타상 하나를 만들어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일길찬을 위해 받들어 모셨다.그가 고인이 되자 동해 흔지가에 뼈를 뿌렸다.임금의 계보를 보면 김개원은 바로 태종 김춘추의 여섯째 아들 개원각간이니 곧 문희가 낳았다.김지전은 인장일길찬의 아들이다. 동해흔지는 아마 법민을 동해에 장사 지냈다는 말인 듯하다. ◆감산사의 보물 감산사에서 국보 2점을 비롯해 여러 문화재가 출토됐다.일제강점기에 미륵불과 미타불은 원형 손상 없는 상태로 발견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국보로 지정 전시하고 있다.또 대적광전에 안치하고 있는 비로자나불좌상과 몸돌을 포함해 많이 훼손된 상태로 복원된 삼층석탑도 지역문화재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국보 제81호로 지정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전체 높이가 2.52m로, 상당히 이국적인 풍모를 지녔다.살짝 비튼 몸, 화려한 장엄, 길게 드리워진 영락 장식, 몸에 밀착된 군의(치마) 등은 불상에서 처음 나타나는 표현들로 이색적이다. 불상은 머리에 화려하게 장식된 관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볼이 통통하여 원만한 인상이다.목에는 2줄의 화려한 목걸이가 새겨져 있고, 목에서 시작된 구슬 장식은 다리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왼쪽 어깨에 걸치고 있는 옷은 오른쪽 겨드랑이를 지나 오른팔에 감긴 채 아래로 늘어져 있다.허리 부근에서 굵은 띠장식으로 매어 있는 치마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면서 발목까지 내려오고 있다.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는 불꽃무늬가 새겨진 배 모양이다.3줄의 도드라진 선으로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구분했다.불상이 서 있는 대좌는 하나의 돌로 만들었는데, 연꽃무늬를 큼직하게 새기고 있다. 광배 뒷면에는 신라 성덕왕 18년(719)에 불상을 조각했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다.이 글을 통해서 만들어진 시기와 유래를 알 수 있다.돌로 만들었음에도 풍만한 신체를 사실적으로 능숙하게 표현하고 있어 통일신라시대부터 새로이 유행하는 국제적인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석조아미타불입상은 국보 제82호로 지정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전시하고 있다.석조아미타불입상은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인체 비례에 가까운 사실적 표현을 하고 있는 작품성이 돋보이는 불상이다. 불상의 얼굴은 풍만하고 눈, 코, 입의 세부표현도 세련되어 신라적인 얼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신체는 비교적 두꺼운 옷 속에 싸여 있어 가슴의 두드러진 표현은 없지만, 당당하고 위엄이 넘쳐 부처님의 모습을 인간적으로 표현했다.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온 몸에 걸쳐 U자형의 옷 주름을 나타내고 있다. 목에는 한번 뒤집힌 옷깃을 표현했는데 이는 신라 불상의 특징으로, 불상의 전체적인 형태와 함께 불상을 박진감 있게 보이게 한다.불상의 몸체 뒤의 광배는 배 모양이며 가장자리에는 불꽃이 타오르는 무늬를 새겼다.광배 안에는 3줄의 선을 도드라지게 새겨 머리광배와 몸광배로 구분하며, 몸광배 안에는 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불상이 서 있는 대좌는 미륵불과 같이 맨 아래는 8각이고, 활짝 핀 연꽃무늬를 간략하고 큼직하게 새기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이상적 사실주의 양식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불상으로 손꼽힌다.광배 뒤의 기록에 의해 만든 시기와 만든 사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불상으로 우리나라 불교 조각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품이다. 감산사지 삼층석탑은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95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절터 동쪽에 자리한 삼층석탑은 2중 기단위에 3층의 탑신이 얹힌 전형적인 신라후기 석탑이다.오랜 세월의 풍파에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방치되고 있던 것을 1965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다.1층 탑신은 약간의 부분 파손이 있고 2층과 3층 탑신은 없어 옥개석이 포개어진 채 복원됐다. 탑 옥개석은 4단 받침이며 추녀가 살짝 들려 새가 날갯짓을 하는 모습이다.탑 꼭대기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이 남아있다.옥개석 아래 부분에 홈을 파 물 흐름을 방지하는 형식이 특이하다. 감산사 대적광전에 안치돼 있는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경북지방유형문화재 318호 지정 관리되고 있다.협시불도 없이 혼자 불단을 지키고 있는 석조비로자나불은 화강암으로 만든 신라 후기 불상으로 추정된다. 전체 높이는 약 1m, 지긋이 아래를 내려다보는 평화로운 얼굴 표정이다. 눈과 코, 입, 머리, 육계가 제대로 남아 있다.머리는 깨졌던 것을 다시 복원했고 광배와 대좌는 새로 만들어 고색의 향기가 묻어나는 석불과는 다소 대조적인 모습이다.어깨는 듬직해 보이고 두 손은 지권인을 취하고 있는데 근래 보수한 것이다. 현재 비로자나불 중에 거의 초창기 불상이며 등에 조각된 띠매듭은 석불의 옷주름을 연구하는데 중요자료가 된다.등 뒤로 아미타불탱화가 빛깔 곱게 채색돼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감산사태종 무열왕 김춘추는 외교술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전쟁에서 전술과 전략을 구사하는 능력도 탁월했다.김춘추는 전쟁터에서 김유신과 함께 하면서 전략을 수립하고, 실천하는 무력행사는 김유신을 앞세워 대부분 이기는 전투를 했다. 김춘추는 승리한 전쟁터에서 가끔 우연처럼 여인을 취하곤 했다.이 때문에 그의 자녀들은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전생의 인연인 듯 딸과 사위를 잃은 전쟁터에서 만난 여인에게서 아들을 뒀다.김춘추는 끝내 이 부인과 아들을 세상에 알리지 못하고, 음지에서 돌보며 지원했다.그 아들의 이름이 김지성이다.때로는 김지전으로 불리기도 한다. 지성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근골이 아비를 닮아 훤칠하게 빼어나 준수한 외모로 눈길을 끌었다.이 때문에 김춘추는 더욱 그를 숨겨 키워야 했다. 부인들과 다른 아들들의 시기심으로부터 지켜주고 싶어서였다. 김지전은 어려서는 자신이 왕족이라는 사실조차 몰랐다.김춘추가 그의 어머니에게 당부한 탓에 신분을 모르고 자랐다.지전은 왕이었던 아비 김춘추가 죽은 이후에야 어머니로부터 왕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지전은 그의 뛰어난 지혜와 무술 실력으로 상당한 지위까지 올라 나라의 일을 보는 신하로 인정을 받았다.그러다 어머니가 사망하자 67세가 되던 해에 관직을 그만두고 불교에 심취하며 자연에 묻혀 지냈다. 그렇지만 인연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해 자신의 모든 재산을 털어 절을 짓고, 미륵불과 아미타불을 아름다운 솜씨로 빚어 불전에 모시고 후손들이 길이 명복을 빌게 하는 터를 마련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대구·경북 고교 총동창회 〈44〉대구 남산고등학교

대구남산고등학교는 올해 113주년을 맞은 대구에서도 역사가 깊은 학교 중 하나다.1907년 미국 선교사의 부인인 마사 스컷 브루언(Matha Scott Bruen) 여사가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시작한 신명여학교를 모태로 한다.고(故) 김충학 선생이 일제강점기에 인재양성의 중요성을 깨닫고 설립했다.1950년 학제 변경에 의해 신명여중, 남산여고로 분리됐고 2003년 남녀공학으로 전환되면서 지금의 대구남산고로 교명이 변경됐다.1986년 대입학력고사에서 인문계와 자연계 동시 전국 수석, 1997학년도 대학입학수학능력시험에서 대구시 여자 수석이라는 입시 결과는 현재까지도 학교의 큰 자랑거리로 남아있다.◆‘수선화 안녕’대구남산고만의 독특한 인사법이 있다. ‘수선화 안녕’이다. ‘고결’ ‘자존심’을 상징하는 수선화는 대구 남산고의 교화다.이 인사법은 1970년 학생과장으로 재직 중이던 김진석 전 교장선생이 학교만의 인사말을 정하자는 학생들의 건의에 학생부 기획으로 재직하던 김이돌 선생, 학생간부들과 함께 만든 것이다.안녕(安寧)은 ‘안녕하세요’의 낮춤 표현이 아닌 ‘평안하고 강녕하자’는 의미다.2003년 남녀공학이 된 이후 남학생들 사이에서 인사가 어색하다는 의견이 제기돼 한동안 사라졌다가 최근 다시 부활했다고 한다.동창회에서도 애용되고 있다.◆총동창회 역사총동창회는 1983년 4월 발족했다. 당시 초대 회장은 이은남(1회) 동문이다.이후 지역별 동창회가 조직되면서 1986년 11월 서울 지역의 재경 남산여고 동창회가 발족됐고, 서숙희(1회) 동문이 회장으로 선출됐다.현재는 김채숙(17회) 동문이 총동창회장을, 양현숙(16회) 동문이 재경 동창회장을 맡고 있다.총동창회 총회는 4월30일 개교기념일에 즈음해 격년으로 열리고 있다.이날에는 퇴임한 은사들이 참석, 스승과 제자가 사제지정을 나누고 있다.남산 총동창회는 큰 규모의 행사는 없지만 학교의 크고 작은 행사 때마다 참여하며 동문, 선후배들이 마음의 정을 나누고 있다.개교기념일과 스승의 날에 축하하는 자리를 갖고 있으며 모교의 동아리활동과 매년 연말에 열리는 학교축제행사 등에 참여, 지원금을 지급하고 후배들을 격려하고 있다.매년 수능시험 전에는 회원들이 직접 수능 격려품을 인사말과 함께 전하는데 고희가 넘은 선배들도 직접 학교를 찾아 후배를 격려하고 격려품을 전달하고 있다.◆장학재단장학재단은 2015년 1월 발족됐다.2013년 총동창회 총회에서 후배들의 학업을 격려하고 지원하는 장학재단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시작돼 2년간의 기금조성을 통해 만들어졌다.초기에는 장학위원 25명의 기부금과 동창회원의 성금으로 기금이 마련됐다.총동창회 총회나 이사회, 기수별 모임에서 장학재단의 소식이 전달되며 성금이 마련되기 시작했다.2015년 이후 현재까지 매년 신입생 2명과 우수 졸업생들을 선발,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이와 별도로 해마다 각 학년별 남산을 대표하는 리더 학생들에게 ‘비전 남산인상’을 수상하고 있다.학급별로 3명씩 모두 9명의 학생에게 사회의 빛나는 지도자로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황금 열쇠를 전달하고 있다.장학재단이 설립되기 전에도 동문들이 십시일반 모은 돈으로 장학금을 지급했다.특히 1997년에는 대구시 여고 중에서 서울대에 최다합격자를 배출, 총 12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한 적도 있다.◆학교 곳곳에 선배 사랑 흔적남산고 총동창회는 후배들을 위해 모교 가꾸기에도 열심이다.본관 뒤뜰애는 부모와 아이들의 모습을 상징하는 ‘모자상’이 위치해 있다.이는 개교 30주년을 맞아 총동차회가 건립한 것이다.이는 현재 졸업기념 사진을 찍을 때 가장 학생들이 많이 찾는 학교의 중요한 상징물로 거듭났다.또한 1988년 재경 동창회에서 개교 35주년을 기념하면서 1986학년도 전국 수석 합격을 기념하는 교훈탑도 건립했다.1986년에는 정두이(3회) 동문이 우산 700개를 기증했는데 이때부터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갑자기 비가 오는 날 ‘우산 빌려주기’ 행사를 시행하고 있다.역사만큼이나 큰 소나무, 은행나무 사이사이로 조화를 이루는 수십 점의 조형물은 서숙희(1회) 동문이 기증한 것이다.잉어들의 보금자리가 되는 연못과 작은 사랑의 폭포는 김영자(2회) 동문이 후배들의 인성교육과 정서교육을 위해 기증했다.이 외에도 2000년 설희자(18회) 동문은 모교에 대한 사랑을 담은 편지와 함께 2000년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양화부문 우수상을 수상해 받은 상금 일부를 전하기도 했다.또한 화가 임현자(11회) 동문은 본교의 창의관 건립을 축하하며 작품 한 점을 기증했다.◆자랑스러운 동문올해 남산고에는 처음으로 금배지의 주인공이 탄생했다.대구 북구갑의 국민의힘 양금희 의원이다. 양 의원은 미래통합당(국민의힘 전신) 여성 공천을 받아 19대 국회 권은희 전 새누리당 의원에 이어 대구 북구갑의 두 번째 여성 의원이 됐다.대영교육재단 2대 이사장 서영란(3회), 호암상 첫 여성수상자이자 2000년 미국의 유명 과학 잡지 ‘디스커버리’가 발표한 ‘21세기 세계과학을 이끌 20인의 과학자’에 선정된 미국 시카고대 물리학과장인 김영기(25회), 의사이자 방송인인 여에스더(29회), 김천의료원장 김미경(29회), 국정원 3차장 김선희(33회), 사법고시 최연소 합격 박지원(55회) 등 다양한 분야에 남산고 출신이 다수 포진해 있다.연예인과 스포츠인도 있다. 탤런트 최란(24회), 개그우먼 김효진(40회)과 가수 비오브유 맴버이자 슈퍼스타K6 출신인 송유빈, 13회 아시안게임 공기소총 단체부문 은메달리스트 이기영(40회)이 이 학교 출신이다.◆김채숙 총동창회장 인터뷰‘먼저 의를 구하자. 제 할 일을 다하자, 서로 섬기고 돕자.’남산고 교훈이다.김채숙 총동창회장은 가장 큰 학교 자랑거리로 “남산고 동문들은 교훈을 누구보다도 마음 속 깊이 잘 간직하며 실천하고 있는 것”을 들었다.김 회장은 “남산고 동문들은 이(利)보다는 의(義)를 중요시한다. 이로움 또는 이익보다 마땅함이나 옳음을 우선시한다는 것이다. 또한 서로 존중하고 도우려는 마음이 크다”며 “총동창회장 2년, 재경동창회장 6년을 했다. 이것만큼은 자부심이 있다”고 강조했다.그러면서 한 사례를 들어주겠다며 에피소드 하나를 전했다.김 회장은 “남산고 최초 국회의원이 탄생해 이를 축하해 주고자 양 의원에게 화환을 전달하고 싶다는 의견을 내비쳤다”며 “이에 양 의원이 꽃은 충분히 많다며 손사래를 쳤다. 정 주고싶다면 화환대신 쌀을 달라고 하더라”고 전했다.이어 “북구청을 통해 북구 내 어려운 이웃들에게 전달하겠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마음이 이쁘고 갸륵하던지 이를 동문들에게 전하니 동문들도 개인적으로 더 보태겠다고 나섰다”며 “성금은 모아둔 상태다. 코로나19로 아직 전달하지는 않았지만 조만간 북구청을 통해 기부할 생각”이라고 했다.김 회장은 2018년 4월 총동창회장으로 취임했다. 지난 4월 2년의 임기가 끝났지만 코로나19로 새로운 회장을 뽑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의견을 반영, 후배들을 위해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여전히 연임 중이다.김 회장은 “후배들의 자기계발에 ‘든든한 후원자’ ‘좋은 스승’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이를 통해 남산고에서 다양한 계층에서 지역사회 나아가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가 많이 배출됐으면 하는 바람이다”고 했다.이혜림 기자 lhl@idaegu.com

(뚜벅뚜벅 대구·경북 한 바퀴)<7>대한민국 최중심에서 즐기는 감성여행, 상주

대한민국의 최 중심에 위치한 상주는 서쪽으로 백두대간 69.5㎞, 동쪽으로 낙동강 34㎞의 생태 축을 끼고 있는 청정생태도시다.지리적인 중요성과 연관된 역사와 흥미 있는 문화유산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서쪽으로 백두대간 줄기를 따라 펼쳐진 울창한 숲과 청정계곡은 일상에 지친 삶에 쉼을 제공한다.동쪽으로는 낙동강과 함께 드넓은 평야가 자리 잡고 있다. 여기서 수확되는 쌀은 과거 임금님의 진상품으로 올릴 만큼 질 좋은 쌀로 유명하다.낙동강의 어원이 상주의 옛 이름인 낙양의 동쪽에 흐르는 강이란 뜻에서 알 수 있듯이 상주와 낙동강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태백의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은 영남내륙을 관통해 남해로 흘러든다.위드 코로나 시대, 낙동강변 언택트 관광지로 떠오르고 있는 상주에 대해 알아본다.◆낙동강 제1경 경천대낙동강 변에 위치한 경천대는 낙동강 1천300여 리 물길 중 경관이 가장 아름답다는 ‘낙동강 제1경’의 칭송을 받아 온 곳이다. 하늘이 만들었다 해 ‘자천대’라고도 불린다.경천대를 중심으로 조성된 관광지는 비교적 작은 규모지만 길이 참 많다. 높지 않은 곳의 전망대, 아기자기한 산책길 등으로 가벼운 나들이에 제격이다.산악자전거를 탈 수 있는 코스와 4대강 종주 자전거길이 동시에 갖춰져 특히 자전거 여행객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마을 내키는 대로 올라가다 보면 우담 채득기 선생의 슬픔과 한이 깔린 경천대와 무우정을 만날 수 있다.무우정은 낙동강을 굽어보는 절벽에 세워진 정자다.병자호란이 일어난 후, 청나라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볼모로 끌어갔다. 이때 함께 따라가 고생을 했던 사람 중 한명이 채득기 선생이다. 이후 채득기 선생은 모든 관직을 마다하고 이곳에 내려와 은거하며 학문을 닦았다.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 정자 무우정이 바로 채득기 선생이 머물며 마음을 다스린 곳이다. 무우정은 상주에 살던 선비들의 모임 장소로 애용됐으며 여러 문객이 자주 들리는 명소로 유명해졌다.무우정 가까이 경천대가 있다. 낙동강 주위를 조망하기 좋은 최적의 위치이다. 낙동강 제1경이란 말이 허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와 동시에 자천대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된 이유도 가슴에 와 닿는다.관광지에는 전망대 외에도 야영장, 목교, 출렁다리, MBC드라마 상도 세트장, 어린이 놀이시설, 수영장, 눈썰매장, 식당 등이 갖춰져 있다. 소나무 숲속의 아담한 돌담길과 108기의 돌탑이 어우러진 산책로와 맨발체험장도 있다.2018년부터 개장한 밀리터리 테마파크는 신개념 레저스포츠 체험장으로서 시가지 전투체험과 근접 전투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체험장은 6천㎡의 부지에 주유소와 빌딩, 자동차 등으로 시가지를 재현했다. 헬멧과 조끼 등 안전장비를 착용하고 전동식 권총으로 30명까지 서바이벌 경기를 즐길 수 있다.◆낙동강 비경 품은 경천섬경천섬의 면적은 20만㎡로 낙동강 가운데 자연스런 물의 흐름에 따른 퇴적물로 형성된 삼각주이다. 4대강 사업으로 새롭게 생태공원으로 조성됐다.원래 모래사장을 걸어서 섬까지 갈 수 있었지만 상주보가 설치된 이후 180m에 이르는 경천섬 보도교(범월교)를 통해서 건너 갈 수 있다.지난해 11월 상주보를 연결하는 국내 최장(975m) 수상탐방로가 설치된데 이어 올해 1월에는 길이 345m의 국내 최장 보도현수교(낙강교)가 개통됐다. 야간에는 경관조명이 운치를 더한다.이에 도남서원~경천섬~보도현수교~수상탐방로~상주보~도남서원으로 이어지는 총 4.5㎞의 둘레길이 완성됐다. 상주보와 경천섬의 아름다운 경관을 보면서 낙동강 위를 걷는 것이 가능해졌다.해질 무렵이면 경천섬 너머로 펼쳐지는 노을과 황금빛으로 물든 낙동강은 탄성을 절로 자아낼 만큼 장관을 이룬다.◆조선시대 체험, 회상나루 관광지중동면 회상리에 조성된 ‘회상나루 관광지’는 옛 선비들의 ‘시회’ 공간이었던 도남서원과 낙동강 옛길에 있던 역원, 주막 등에서 착안해 조성됐다.주막촌과 객주촌, 낙동강 문학관이 조성됐다. 낙동강 회상나루의 새로운 해석과 재현을 통해 낙동강변 새로운 관광의 명소로 거듭나고 있다.주막촌은 조선시대 상주지역 음식조리서인 시의전서를 재현한 전통음식점(백강정)으로 운영되고 있다. 객주촌은 한옥으로 지어진 한옥펜션이다.인근에 위치한 학 전망대와 비봉산 자락의 전통사찰인 청룡사는 경천섬 주변의 수려한 자연경관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인기가 많다.◆수상레저·캠핑까지, 수상레저센터상주 낙동강에는 상주보·낙단보 수상레저센터와 상주보 물놀이장, 상주보 오토캠핑장 등 다양한 즐길 거리가 마련돼 있다.상주보 수상레저센터에서는 수상자전거, 카누, 카약, SUP(패들보드) 등 무동력 수상레저와 폰툰보트(유람선)를 즐길 수 있다.낙단보 수상레저센터에서는 수상스키, 웨이크보드, 제트스키, 바나나보트 등 동력 수상레저를 저렴한 비용에 즐길 수 있다.상주보 오토캠핑장은 80면 규모의 캠핑 사이트와 화장실, 샤워장 등 각종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저렴한 가격으로 강변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감상하면서 힐링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상주보 물놀이장은 5천200㎡의 부지에 물놀이장 361㎡(물놀이장 1개소 낙수시설 6개소), 야외풀장 212㎡, 유아전용풀장 160㎡ 등을 갖추고 있다.수상레저센터는 4월부터 11월까지, 물놀이장은 6~9월까지 운영하며 오토캠핑장은 연중 운영한다.◆알고 보면 박물관 부자2017년 개관한 낙동강역사이야기관은 낙동강 주변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공간이다.낙동강이 간직한 역사성과 상징성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연면적 6천433㎡(지하 1층, 지상 2층)로 어린이체험관, 4D영상관, 생활문화관, 나룻배체험관, 경제교류관 등을 갖췄다.상주박물관은 상주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선사시대부터 시대별로 상주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 볼 수 있다. 탁본, 발굴체험 등을 즐길 수 있는 어린이체험실도 마련돼 있다.상주자전거박물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자전거박물관으로, 2002년 개관했다. 저탄소 녹색성장과 관련하여 무공해 교통수단인 자전거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돕고자 마련됐다.압축한 나무판을 프레임으로 사용한 자전거, 5층 자전거, 다양한 형태의 아트바이크, 큰 바퀴를 단 자전거 등 다양한 자전거를 볼 수 있다. 자전거의 역사를 배우고 여러 종류의 자전거를 타볼 수 있는 체험교육장이다.국립낙동강생물자원관은 낙동강의 다양한 생물과 지구상의 동식물 표본을 전시해 어린이 생태환경교육장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어린이들이 부모와 함께 찾기 좋은 곳이다.◆낙동강 느림의 미학 속에서 낭만을 느끼세요강영석 상주시장은 “오랜 전통문화를 간직한 저력 있는 역사 도시 상주는 통일신라시대 9주의 하나였고, 고려시대에는 8목의 하나였으며, 조선시대에도 관찰사가 상주목사를 겸할 정도로 유서 깊은 도시”라며 상주를 소개했다.상주는 사통팔달의 도시답게 4개의 고속도로와 6개의 나들목이 있어 전국 어디에서나 2시간 내 접근할 수 있는 뛰어난 접근성을 자랑하고 있다.강 시장은 “하늘이 내려 준 천혜의 절경을 가진 경천대와 느림의 미학이 살아 있는 낙동강의 명물 경천섬은 다양한 코스의 산책로를 갖춰 낙동강의 풍경과 함께 여유롭고 안전한 여행을 즐길 수 있는 관광지”라며 “특히 올해 1월에 경천섬과 회상나루 관광지를 잇는 국내 최장 보도현수교인 낙강교가 개통해 상주의 새로운 랜드 마크로 거듭나고 있다. 상주보까지 이어지는 수상탐방로 위를 유유자적 걸으며 낙동강의 낭만을 느껴보시는 것도 좋겠다”고 말했다.이어 “자전거와 승마, 수상레저 서바이벌게임, 패러글라이딩 등 다이내믹한 체험도 빼놓을 수 없다”며 “여러 물줄기가 모여 쉬어가는 곳, 낙동강을 품은 풍요의 땅 상주로 오셔서 힐링하며 쉬어가길 바란다”고 덧붙였다.이승엽 기자 sylee@idaegu.com

생소한 두경부암…머리와 목에 생긴 모든 암

‘두경부’라는 이름에서부서 생소함을 느끼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머리와 목에서 생기는 모든 암을 두경부암이라고 한다.후두암의 빈도가 두경부암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가장 많다.그 밖에 구강암(입술, 구강), 구인두암(연구개, 편도), 비인강암(비강의 뒷부분), 하인두암(식도 입구부) 등도 두경부암이다.우리나라에서 발생하는 다빈도암(5대 암) 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목에는 중요한 혈관과 신경들이 지나므로 항상 두경부암을 치료할 때 늘 주의해야 할 암으로 꼽힌다. ◆술과 담배는 삼가다른 암들과 마찬가지로 두경부암을 일으키는 원인은 담배와 술이다.‘담배’와 ‘술’을 끊는 것은 참 힘들다.진료실에서 두경부암으로 처음 진단된 후 갖고 있던 담배를 버리는 이들이 많다.하지만 치료 도중 담배를 다시 피우는 이들도 상당수다.또 술은 괜찮을 거라는 착각을 하는 이들도 있다.많은 객관적 연구에서 술과 담배를 동시에 접할 경우 두경부암의 발생 위험도는 각각 접할 때 보다 몇 배나 증가한다고 보고하고 있다.따라서 두경부암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담배와 술을 삼가야 한다.모든 암이 담배, 술과 연관돼 있지만 두경부암은 특히 더욱 심하다.3주간 목소리 변화, 몇 주간 목소리 크기가 증가, 주변조직과 고정돼 움직이지 않는 목덩이, 침이나 음식을 삼킬 때 찌르는 듯한 통증, 동일한 부분에 소실되지 않고 반복되는 구내염이 있다면 이비인후과 전문의의 상담을 받아야 한다. ◆주의할 증상들 암의 발생 위치에 따라서 증상이 다르다.가장 흔한 후두암의 경우는 목소리 변화이다.음성을 많이 사용해 목소리가 변한 경우는 보통 1주일 내로 회복된다.하지만 특별한 원인 없이 3주 이상의 목소리 변화가 있다면 반드시 이비인후과 전문의의 진료가 필요하다.만약 구강, 구인두, 하인두(식도 입구)에 암이 생길 경우 침을 삼키거나 음식을 먹을 때 바늘로 찌르는 듯한 심한 통증이 동일한 부분에 반복적으로 생긴다.비인강(비강의 뒷부분)에 암이 있다면 코가 막히거나 고막 안쪽에 물이 차 귀가 먹먹해 지기도 한다.또 상당수의 환자가 목에 만져지는 ‘덩어리’가 있다며 병원을 찾는다.목에 덩어리가 만져질 때 일주일 안에 전신증상(발열, 무력감등)을 동반한다면 염증일 가능성이 많다.반면 말랑말랑하면서 통증이 없고 몇 년 동안 목에 덩어리가 있다면 낭종(물주머니)의 가능성이 크다.주의를 해야 하는 덩어리는 몇 주에서 몇 개월 동안 커지면서 딱딱하고 통증이 있고 고정(손으로 앞뒤로 만졌을 때 덩어리가 움직이지 않을 때)된 경우이다.임파선 전이의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검사와 치료두경부암의 진단은 조직 및 영상 검사로 한다.조직검사는 암 여부를 확인하고자 시행된다.또 영상검사(CT, MRI, PET 등)는 진단과 치료법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학을 한다.조직검사는 보통 2가지로 구분한다.암이 눈으로 직접 보일 경우는 펀치생검(punch biopsy)을 시행해 두경부암의 종류를 확진한다.전이된 경부 임파선은 세침흡인검사(fine needle aspiration)를 한다.두경부가 하부 호흡기 폐, 소화기인 식도 및 위와 연결돼 있다.따라서 두경부암이 종종 폐암, 식도암, 위암 등과 함께 생기는 중복 암의 빈도가 높아지므로 두경부암 진단 시 위내시경과 폐CT를 함께 하기도 하다. 두경부암의 치료는 수술적 치료와 비수술적 치료로 나눌 수 있다.비교적 초기 암일 경우 수술 또는 항암방사선 치료 중 하나를 선택하기도 한다.반면 암이 진행된 경우라면 수술과 항암방사선의 병합 치료가 필요하다.병합 치료를 할 경우 치료 후유증도 커지므로 조기에 발견해 조기에 치료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두경부는 말하고 음식을 씹고 삼키는 중요한 기능을 하는 부분이고 또 목 주위에 중요한 혈관과 신경이 지난다.따라서 치료 후 발생할 기능 장애를 항상 염두에 두고 치료해야 한다.예를 들어 후두암 초기라면 성대 레이저 절제술로 치료 할 수도 있고 방사선 치료를 단독으로 시행할 수 있다.레이저 절제술은 전신 마취로 한쪽 성대를 절제하는 수술로 입원기간은 짧지만, 수술 후 약간의 허스키 목소리가 나올 수 있다.반면 방사선 치료는 목소리 보존에서는 레이저 절제술보다 유리하나 치료 기간이 두 달 정도 걸리는 단점이 있다.최근에는 두경부암의 치료에 로봇수술이 도입돼 기능을 보존하면서도 암의 완전한 절제가 가능해진 덕분에 입원 기간도 많이 줄게 됐다.다만 로봇 수술은 일부 제한된 암 환자에서 적용되는 치료법이다. 도움말=계명대 동산병원 이비인후과 여창기 교수이동률 기자 leedr@idaegu.com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문화재…안동 송은정

가을의 끝자락에 접어들었다.초겨울이 다가오는 가운데 산은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들었고, 가을의 만연한 기운을 뽐내기 바쁘다.바쁜 일상 속 가을의 막바지를 느끼고, 코로나19로 인한 잠깐의 휴식을 취할 겸 안동을 방문했다.대구에서 안동으로 향하는 긴 도로에서는 일상 속 잠깐의 휴식을 보상해주듯 산과 밭 곳곳에서 여유로운 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해줬다.산에는 알록달록한 단풍이 우거졌고 떨어진 낙엽들은 바람에 흩날렸다.가을 냄새도 물씬 났다.따스한 햇볕 아래 올라오는 은은하고 포근한 나무 냄새와 흙과 풀 향은 바쁜 일상을 달래기에 충분했다.세계문화유산의 도시라는 명칭에 걸맞게 안동은 옛날 옛것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었다.아름다운 풍경과 운치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휴식터와 같은 곳이었다.과거와 미래가 함께 한 매력적인 관광자원이 무궁무진하다. 안동에는 관광지인 하회마을과 월영교, 도산서원 등이 있다.자주 접할 수 없지만 자연과 함께 어우러져 있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문화재들도 넘쳐났다.소박하지만 긴 세월로 인해 고풍스런 멋을 풍기고 있었다.안동에 들어서자마자 안동만의 예스러움과 고즈넉한 정자, 가옥들이 눈에 들어왔다.큰 도로에서 벗어나 20분가량 좁고 굽은 골목을 지났다.안동 ‘송은정’이라는 작고 아담한 정자를 만날 수 있었다. ◆한 폭의 그림, ‘송은정’송은정은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솟아 있는 정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경북 안동시 아랫태장길 43-13에 있다.봉정사 삼거리인 교차로를 지나 김태사묘 맞은편 좁은 길로 들어가면 산 중턱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송은정이 위치한 마을은 아주 한적하고 고요한 작은 동네다.오후 3시가 훌쩍 넘은 시간에도 동네는 조용했고, 지나가는 주민 1~2명만 드문드문 있었다.인근에는 태장1동 노인정이 있다. 이곳에서 바라다본 정자는 산과 어우러져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와 그림 같은 장면을 눈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송은정을 더욱 가까이서 보기위해 다가갔다.아주 큰 밭을 지나가야했다. 작은 차가 지나다닐 정도의 좁은 골목이었다.골목을 지난 뒤에는 사람이 살지만 아주 오래된 흔적이 느껴지는 집 5채가량이 눈에 띄었다.좁은 길이었지만 정자 앞에는 다행히도 널찍한 주차공간이 있었다.정자를 더욱 가까이서 보려면 가파른 돌과 흙 길을 밟고 올라서야 했다.정자는 작았지만,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완연한 가을을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장소였다. 억새풀과 나무 등이 어우러져 남다른 기운을 자랑했다. ◆경북 문화재 제473호송은정은 2004년 12월6일 지정된 경북 문화재자료 제473호다.송은정의 역사는 아주 옛날인 조선 중기로 거슬러 올라간다.송은 송형구(1598~1675)가 관직에서 은퇴한 현종 5년 1664년에 학문 연마와 향촌 사림과의 가까운 왕래를 목적으로 창건했다고 전해진다.처음에는 이송천변에 있었다.송형구의 후손 송인명이 조상을 추모하고 유업을 계승하기 위해 1933년 태장리로 옮겨왔다.송은정은 야산 기슭 중턱에 남쪽을 바라보고 자리해 있다.후대에 훼손됐지만 일제 강점기의 건축양식으로 새로 건립됐다.이곳은 아담한 들판을 건너 태계가 흘러 선비들이 은거하기에는 좋은 자리라고 불린다.조상의 깊은 뜻을 가까이서 느끼고 싶어서였을까.송은정 아래에는 양주 송씨 후손들이 오래전부터 지내고 있다고 전해진다. ◆송형구, 관직에서 이름난 문관송형구는 조선 중기 문관이다.본관은 양주, 자는 태이, 호 송은이며 안동 출신이다.1642년 식년시 생원에 합격했고 같은 해 식년시 진사에 합격해 관직은 관상감직장 찰방 등을 역임했다.그는 1660년 진사 시설부터 역서에 관심이 깊었다.원나라 허형이 만든 대통력과 명나라 때 독일 선교사 아담 샬의 시헌력에 대해 많은 공부를 했다고 한다.시헌력이 1644년 조선에 전해진 후 1653년부터 널리 사용됐다.송형구는 평소 시헌력에 비해 대통력이 더욱 정확하다고 생각해 당시 대통력이 후세에 전해질 수 있는 방도를 찾아달라는 상소를 올렸다.1661년 전관상감직장으로서 음력과 양력이 더해져 24절기에 맞추어 제정된 시헌력을 폐지하고, 기존에 사용하던 음력 대통력을 사용할 것을 청했다.하지만 관상감에서 일식과 월식을 통해 역수의 차이를 조사한 결과 대통력이 시헌력에 비해 오차가 크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1669년 새로 만들어진 달력의 윤달 계산에 오류가 있음을 상소해 시헌력의 오차를 관상감에게 조사하게 했으나 윤달 계산에 오류가 없음이 확인됐다고 한다.1664년 관직에서 물러났다.송형구는 고향인 안동의 송천읍으로 내려갔지만 학문을 멀리하지 않았다.지역 사림들과 친목을 도모하고 학문을 연구할 목적으로 송은정을 세웠다. ◆조상의 지혜 엿보여송은정은 정면 2칸, 측면 1칸 반의 1명이 살 정도의 아주 작고 소박한 정자다. 온돌방 1개와 마루 1개 및 툇마루로 구성돼있다.건물 좌측에 온돌방, 우측에 마루방을 들였는데 앞쪽은 반 칸의 퇴칸을 두고 퇴주 앞으로 2자 정도 마루를 더 확장시켜 계자난간을 세웠다.문이 잠겨있지 않아 방안 곳곳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오래된 기와집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이 지낼 수 있을 정도의 비교적 잘 정돈돼있고, 깨끗한 편이었다.정자 안 마루와 온돌방 사이에도 문이 달려있는데 아마도 겨울철 온돌방에서 지내며 추위를 대비하기 위한 것 같았다.또 남향으로 마루쪽 큰문을 통해서는 해가 잘 들어와 여름철에는 문을 열어놓고, 마을을 내려다보며 사색하기 좋을 것 같았다.건물은 경사면에 비스듬히 지어져있어 하부에 시멘트로 기둥이 만들어져 있었다. 정면은 화강석 주초를 놓고 위에 4각의 누하주를 세웠다.자세히 건물 안을 들여다보면 거실 위에는 향촌 사림들의 시판이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한자로 돼 조금은 보기 어렵겠다. 하지만 학문에 조예가 깊던 조상의 깊은 뜻을 기리기 위한 가문의 남다른 자부심이 느껴졌다.이는 송은정상량문의 기문과 송은정의 내력을 알 수 있는 송은정기의 기문이라고 한다.한글로 쓰인 송은정 약사의 편액도 볼 수 있다.바로 앞에는 마치 정자를 지키고 있는 듯 한 아주 큰 소나무 2그루가 서있었다. 늠름한 자태를 자랑했다.소나무 2그루 사이로 들어오는 햇볕은 따스한 빛이 되기도 했고, 그늘이 되기도 해 운치를 더했다.운이 좋게 노을이 지는 풍경을 바라다볼 수 있었다. 정자에서 마을을 바라보는 운치는 장관이었다.가까이 있는 자연과 멀리서 희미하게 보이는 도로 등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았다.선조가 남기고 간 유물을 돌볼 수 있는 후손들의 마음은 어떨까.정자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과거 조상이 했던 생각과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당시 선조의 경험과 지혜 등을 느낄 수 있었고, 잠깐의 휴식과 함께 현대사회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을 되돌아 볼 수 있었다.바쁜 일상 속에서 힐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기 위해 안동 송은정에서 잠시 쉬어가는 것은 어떨까.구아영 기자 ayoungoo@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87) 낙산의 두 성인과 조신

삼국유사는 낙산사에서 의상법사와 원효법사가 관음보살 진신을 만나는 과정을 대비해 그리고 있다.의상법사는 관음을 친견하고 낙산사를 창건하는 고승으로 그려진다. 원효는 시골 아낙으로 변신한 관음보살을 만났지만 여염집 여인으로 변신한 진신을 알아보지 못한 승려로 표현했다. 혜공과의 만남에서도 원효는 깨우침이 부족한 승려로 소개된다.일연 스님은 원효의 길을 소개하면서 많은 업적을 기리기도 했지만 의상이나 혜공 등의 고승에 비해 법력과 깨우침의 정도가 낮은 수준으로 기록했다. 의상과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는 길도 두 번이나 시도했지만 중도에서 포기하는 것으로 소개된다.의상은 유학의 길을 떠났지만 원효는 해골바가지의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어 돌아왔다고 기록해 지금까지 ‘일체유심조’라는 원효의 깨우침을 한마디로 줄여 전한다. 평범한 원효의 출신 배경 때문인지 아니면 사실에 근거한 위인의 소개인지 꼼꼼히 살펴보면 어딘지 모르게 원효에 대한 평가는 비교 절하돼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낙산사 창건과 성인들의 일화를 살펴본다. ◆삼국유사: 낙산 두 성인 관음과 정취 그리고 조신옛날 의상법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관음보살의 진신이 해변의 굴속에 머무르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의상이 7일간 재계하고 앉았던 자리를 새벽에 물에 띄웠더니 용천팔부의 시종들이 굴 안으로 인도해 들어갔다.굴속에서 하늘에 예를 올리자 수정염주 한 꾸러미를 내주므로 의상이 그것을 받아 나오니 동해의 용이 또한 여의보주 한 알을 바쳤다. 의상이 받들고 나와 다시 재계한 지 7일 만에 바로 진신의 모습을 친견하자, 관음보살이 말하기를 “내가 앉은 산꼭대기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을 것인즉 마땅히 그곳에 불전을 지어야 할 것이다”라 했다. 의상이 이 말을 듣고 굴을 나오자 과연 대나무가 땅으로부터 솟아났다.바로 금당을 짓고 관음상을 만들어 모시니 원만한 얼굴과 수려한 모습이 엄연하여 마치 하늘에서 만들어 낸 듯하였다.이 때문에 절 이름을 낙산사라 했다. 의상법사는 받은 두 구슬을 성전에 모셔두고 떠났다. 그 후에 원효법사가 의상의 뒤를 이어 와서 예를 올리고자 했다.처음 남쪽 교외에 왔을 때는 논 가운데에 흰옷을 입은 여인이 벼를 베고 있었다.법사가 농담 삼아 벼를 달라고 하자 여인도 장난삼아 벼가 잘 영글지 않았다고 답했다.다시 다리 밑에 왔더니 어떤 여인이 월경 수건을 세탁하고 있었다.법사가 물을 달라고 하자 여인은 더러운 물을 떠서 그에게 바쳤다. 법사가 그 물을 엎질러버리고 다시 냇물을 떠서 마셨다. 이때 들 가운데 선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가 말하기를 “휴제호 화상” 하고는 모습을 감춰버렸다. 그 소나무 밑에는 신 한 짝이 벗겨져 있었다.법사가 절에 도착했더니 관음보살 자리 밑에 또 앞에서 본 신 한 짝이 있었다.그제야 전에 만났던 여인이 관음의 진신임을 알았다.법사가 굴에 들어가 관음의 진신 모습을 보려했으나 풍랑이 크게 일어나 들어가지 못하고 떠났다. 그 후에 굴산조사 범일이 태화연간(827~835)에 당나라로 들어가 명주 개국사에 갔더니 왼쪽 귀가 떨어진 나이 어린 승려가 여러 승려들의 끝자리에 앉아 있었다.그가 굴산조사에게 말하기를 “저 역시 신라 사람으로 집은 명주 지역인 익령현 덕기방에 있습니다. 조사께서 후일 본국으로 돌아가시거든 반드시 저의 집을 지어주소서”라 했다. 이러고 나서 조사는 큰 설법하는 곳을 두루 유람하다가 염관에게 불법을 받고 회창 7년 정묘(847)에 본국으로 돌아오자 먼저 굴산사를 창건하고 불교를 전파했다. 대중 12년 무인(858) 2월15일 밤 꿈에 전에 보았던 어린 승려가 창 아래에 와서 “옛날 명주 개국사에서 스님과 약속하여 이미 승낙까지 받았는데 어찌 그리 지체하십니까?”라 말했다.조사가 놀라 꿈에서 깨어나 수십 명을 데리고 익령 지역에 도착하여 그의 거처를 찾았다. 낙산 아랫마을에 덕기라는 여자에게는 여덟 살 된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항상 마을 남쪽의 돌다리 주변에 나가 놀았다.그의 아들이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나하고 같이 노는 아이 가운데 금빛 나는 아이가 있습니다”라 했다. 그의 어머니가 이를 조사에게 알리자 조사가 놀라고 기뻐하며 그 아이와 함께 놀았다던 다리 밑에까지 가서 찾아보니 물속에 돌부처 하나가 있어서 그것을 꺼냈다.왼쪽 귀가 떨어진 것이 전에 보았던 나이 어린 승려와 같았다.이에 간자를 만들어 절 지을 곳을 점쳐보니 낙산 위가 좋다고 나왔다. 이에 불전 세 칸을 짓고 그 불상을 모셨다. 그 후 100여 년이 지나 들에 불이 나 이 산까지 번져왔으나 오직 두 성인을 모신 전각만이 화재를 면하고 나머지는 모두 타버렸다.몽고의 침략 이후 계축(1253), 갑인(1254) 연간에 두 성인의 진용과 두 보주를 양주성으로 옮겼다. 몽고 군사가 침공해와서 성이 함락되려 하자 주지인 선사 아행이 은으로 된 합에 두 보주를 담아서 몸에 지니고 도망치려하자 이름이 걸승인 절의 종이 이것을 빼앗아 땅속 깊이 묻고 발원하기를 “내가 만일 병란에서 죽음을 면치 못한다면 두 보주는 끝내 인간 세상에 나타나지 않아 이것을 아는 자가 없을 것이고 만약 내가 죽지 않는다면 마땅히 두 보주를 받들어 나라에 바칠 것이다”라 했다. 무오년(1258) 11월이 돼 불교의 장로인 기림사의 주지 대선사 각유가 임금께 말씀드리기를 “낙산사의 두 보주는 나라의 신성한 보물로 양주성이 함락될 때 절의 종 걸승이 성안에 묻었다가 적병이 물러간 뒤 파내어 감창사에게 바쳐서 명주 관아의 창고에 있습니다. 지금 명주성이 위태로워 지킬 수 없으니 마땅히 대궐로 옮겨두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 했다. 임금이 허락하여 야별초 10인을 보내어 걸승을 데리고 명주성에서 찾아 대궐 안에 안치했다.그 당시 심부름하던 관원 열 명에게 각각 은 한 근과 쌀 다섯 섬을 줬다. 옛날 신라(서라벌)가 서울이었을 때 세규사(지금의 흥교사) 농장의 막사가 명주 날리군에 있었는데 본사에서 승려 조신을 보내어 농장을 관리하도록 했다.조신이 장원에 올라왔는데 태수 김혼공의 딸을 좋아하게 되어 깊이 미혹됐다.그는 여러 번 낙산사 관음보살 앞으로 나아가 그녀를 얻을 수 있도록 남몰래 빌었다. 이로부터 수년 사이에 그 여인에게 그만 배필이 생겼다.그는 또 불당에 가서 관음보살이 자기의 뜻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원망하며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다가 그리운 정에 지쳐서 잠시 졸았다. 갑자기 꿈에 김흔공의 딸이 기쁜 얼굴로 “저는 언젠가 스님을 잠깐 뵙고 마음속으로 사랑하며 잠시라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부모님의 명령을 어기지 못하고 억지로 다른 사람에게 시집갔습니다만, 이제 부부가 되고자 이렇게 왔습니다”라 말했다.이에 조신이 기뻐 어쩔 줄 모르며 그녀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녀와 40여 년을 같이 살며 자식 다섯을 두었으나 집은 단지 네벽뿐이며 명이주 국이나 콩잎도 넉넉지 못했다.마침내 완전히 망해 사방으로 다니며 입에 풀칠을 할 뿐이었다.이렇게 10년 동안 초야를 두루 헤매니 갈가리 찢어진 옷은 몸뚱이조차 가리지 못했다. 부인이 눈물을 흘리며 “50년 동안에 맺어진 정은 끊을 수 없고 은혜와 사랑은 한없이 깊어 참으로 두터운 인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추우면 버리고 따뜻하면 따르는 것은 인정상 차마 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헤어지고 만나는 것도 정해져 있으니 청컨대 여기서 헤어집시다”라 했다. 조신이 이를 듣고 매우 기뻐하며 각각 아이 둘씩을 나누어 헤어지려 하는데 여자가 말하기를 “나는 고향으로 가겠으니 당신은 남쪽으로 가오”라고 했다. 바야흐로 작별하고 떠나려 하는데 꿈을 깼다.타다 남은 등불은 가물거리고 밤도 새려고 했다.아침이 되니 수염과 머리털은 모두 하얗게 세었다.정신이 멍하니 인간 세상에 뜻이 없어지고 이미 괴롭게 살아가는 것도 싫어졌다.마치 한평생의 괴로움을 다 겪고 난 것과 같아 재물을 탐하는 마음도 얼음이 녹듯이 깨끗이 없어졌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의상이 못다한 불사를 이은 원효의상이 중국 유학길에서 신라로 돌아와 문무왕에게 당나라 대군이 침략해 올 것이라는 정보를 전하며 대책을 강구해야 할 것이라 했다.이어 나라의 힘을 든든하게 해줄 부처님의 진신이 강릉 해안의 굴에 있다는 말을 듣고 발길을 재촉했다. 의상이 강릉 관음굴 앞에서 7주야를 기도하며 관음보살 진신을 보기를 청했다.7주야의 기도가 끝나는 날 아침 의상대사가 앉은 자리가 그대로 둥둥 떠올라 관음굴로 들어갔다. 의상은 관음보살 진신을 만나 보주를 얻었다.다시 나오는 길에 용왕의 보주를 하나 더 얻었다. 관음진신이 가르쳐 준 곳에 절을 창건해 낙산사라 이름을 지었다.의상은 다음해 바로 영주로 올라가 백성들의 뜻을 하나로 결집하기 위한 부석사를 창건했다. 이때 의상이 동문수학하던 사형 원효에게 부탁의 편지를 보냈다.“제 기도가 부족해 관음진신과 용왕이 주신 보주를 함께 모시지 못해 절에 이변이 자꾸 일어난다”며 “두 보주를 제자리에 모실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다. 분황사에 머물고 있던 원효는 한걸음에 낙산사로 날아왔다.낙산사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의 일이 뒤죽박죽으로 꼬이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이었다. 원효가 법당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3일을 기도하고 난 다음 “법당 앞에 7층석탑 두 기를 동서로 마주보게 세우고 보주를 각각 탑에 따로 안치하라”고 주문했다. 그 이후 낙산사에서 진심을 담아 기도한 사람들의 소원은 틀림없이 이뤄졌다. 원효가 머무는 곳을 찾아 신도들의 발길도 따라 움직였다. 이 때문에 낙산사와 분황사는 소원을 비는 백성들로 늘 복잡하게 붐볐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차원 다른 여성메디파크병원…산부인과적 여성 성형술 역시 탁월

메디시티 대구를 표방하는 대구에는 수도권 대형병원 못지않은 경쟁력을 가진 의료기관이 많다.산부인과 진료에서 여성메디파크병원은 자타가 공인하는 선도의료기관으로 꼽힌다.여성메디파크는 후유증이 큰 기존 산부인과수술법에서 벗어나 여성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하이푸, 브이백, 복강경 수술 등에 집중했다.산부인과 전문의 중에서 이 같은 고난도 술기를 꺼려하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여준규 여성메디파크병원 대표원장의 역량은 이미 외국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카자흐스탄에서 열린 ‘제1회 산부인과 마스터 클래스’에 참가한 여 원장의 시술 장면이 현지 국영방송에서 방영될 정도였다.메디파크병원은 이미 중국과 카자흐스탄 등에서 외국인 의료관광객을 유치하는 등 해외에서도 탁월한 의료수준을 인정받고 있다.특히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이 후원한 ‘외국의료인력 국내연수사업’에서 지방 중소병원 최초로 여성메디파크병원이 선정되기도 했다.2003년 10월 개원한 수성 여성메디파크병원은 대구의 맨해튼으로 꼽히는 수성구 범어동에서 여성전문병원의 입지를 확실히 굳혔다.부인과, 소아과, 내과, 마취과, 방사선과 등이 밀접한 협진 시스템을 구축해 불임, 복강경, 요실금, 갱년기, 비만 등의 분야에 대한 진료 전문성을 높였다.최고급 시설의 산후조리원과 종합검진센터를 병원 내에 운영 중이다.특히 수맥파와 전기파 차단 자재를 특수시공해 쾌적한 웰빙공간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2005년에는 대구의 제 2중심지로 불리는 달서구에 달서 여성메디파크를 오픈했다.또 대구 동구 팔공산 인근에 여성메디파크병원문화센터를 건립해 병원의 품격을 한 단계 높이기도 했다. ◆산부인과적 여성 성형술은 산부인과 전문의에게 산부인과적 여성 성형술은 그 기능과 모양의 조화를 함께 추구하는 인생의 주름살을 펴주는 ‘인생의 성형수술’로 통한다. 불경기가 계속되고 있지만 여성의 ‘Well-Being(웰빙)’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대단하다.여성의 웰빙은 성형수술로 이어지곤 한다.예전의 성형수술은 얼굴에만 국한됐지만 최근에는 다양한 분야로 확대됐다.얼굴을 고치는 것은 물론 가슴 성형은 이미 보편화됐다.몸매관리를 위해 지방 흡인술과 종아리 축소술까지 했다는 한 여성이 남편에게 섭섭한(?) 대접을 받았다며 고민을 털어 놓은 적이 있다.그때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성형수술은 외부로 보이는 자신감을 회복시켜 주겠지만, 산부인과적 여성 성형술은 그 기능과 모양의 조화를 함께 추구하는 인생의 주름살을 펴주는 ‘인생의 성형수술’입니다”라고 이야기했다.여성들이 더 예뻐지고 더욱 매력적으로 바뀌고 싶어 하는 마음은 본능적인 욕구이다.하지만 성형수술을 결정하기 전에 몇 가지를 명심해야 더욱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다.가끔 ‘성형외과 전문의가 산부인과 성형을 더 전문적으로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잘못된 생각이다.그렇다면 산부인과 전문의가 쌍꺼풀 또는 코 성형 수술을 한다고 하면 어떻게 생각할 지 되묻고 싶다.아마 산부인과 전문의에게 얼굴 성형을 받으려는 여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또 여성 성형술을 받으면 잃어버린 자신감을 회복하고 금술 좋은 부부 관계를 유지할 것이라며 여성 성형술을 권유하는 산부인과 전문의들이 간혹 있다.다른 요인으로 남편과 사이가 틀어졌는데 여성 성형술을 받는다고 과연 관계 회복이 가능할까?무작정 여성 성형술을 받도록 유도하는 의사가 있다면 그 의사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하라고 말하고 싶다. ◆소음순·회음부 성형술 소음순 성형술은 시술하는 방식에 따라 비용이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소음순 비대증은 그 모양과 형태가 워낙 다양하다.시술법은 크게 일반 성형과 레이저 성형으로 크게 나눈다.수술 후 흉터가 남는 지, 수술 때 출혈이 있는 지, 디자인의 세밀함 차이 등으로 비용의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또 단순 소음순 비대가 아니라 소위 ‘클리토리스’라고 불리는 음핵 주변에 피부 주름이 있다면 주름 제거술을 병행해야 해서 추가 비용이 생긴다.또 음핵을 덮고 있는 표피가 너무 크고 두꺼운 경우에는 ‘음핵 포경술’을 해야 한다.일반적으로 수술 후 바로 일상생활이 가능하지만 간혹 2~3일 동안 약간의 불편감을 호소하는 여성도 있다.하지만 일주일 정도만 지나면 대부분 호전된다.단 2주가량은 성관계와 자전거 타기 등을 피해야 한다.이와 함께 회음부는 질 입구와 항문 사이의 공간을 말한다.자연분만 후 손상된 상태로 회복되거나 회음부 절개 부위의 흉터 때문에 모양이 자연스럽지 않거나 뒤틀어져 항문 주변까지 기형적 모양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이로 인해 질염이 자주 재발하고, 비위생적인 상태가 되기도 한다.회음부 성형술은 회음부를 다시 출산 전의 모양으로 복원시켜 외관상은 물론 기능적인 만족을 주는 수술이다.또 선천적으로 항문과 질 입구 사이의 거리가 너무 짧아서 질염 노출이 잦은 경우에도 회음부 성형술을 하기도 한다.간혹 출산 후 없던 성교통이 생겼을 때도 시행한다. ◆레이저 디자인 질 성형술 레이지 디지인 질 성형술은 소위 ‘예쁜이 수술’이라고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여성 성형술이다.의학기술의 발달에 따라 수술법도 크게 발전했다.단순 질 성형에서 레이저 디자인 성형 및 오르가즘 증폭술, 불감증 개선 치료 등의 다양한 수술법이 개발됐다.‘예쁜이 수술’이라고 불리던 과거의 단순 질 성형은 질 입구와 질 전방 일부만을 좁혀주는 것으로 20분 이내에 수술을 마칠 수 있었다.하지만 수술 후 효과가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 하거나, 오히려 수술 부작용 등으로 재수술을 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반면 최신 수술법은 질 안쪽 후벽, 전벽 모두 성형을 할 뿐만 아니라 질 점막하부 기저 근육층까지 당겨서 탄력도를 높인다.배우자의 신체 구조에 따른 맞춤형 성형도 시행되고 있다.최근에는 일반적으로는 성 관계 경험이 있지만 임신하기 전의 20대 상태로 돌아가는 느낌을 갖는 최고 난이도의 수술이 가능하다.숙련된 산부인과 전문의에게 제대로 수술을 받는다면 시술 후 6주가 지나면 20대로 돌아갈 것이다. ◆질 필러 시술질 필러는 질 성형 수술의 부담감, 마취에 대한 거부감, 6주 동안 일상생활의 불편 등을 해소하는 새로운 수술법이다. 마취 없이, 금식하지 않고 언제든지 시술받기를 원할 때 30분 정도 마취연고만 바른 후 바로 시술할 수 있다.시술 후 통증도 전혀 없으며 일주일 후부터 바로 성관계를 가질 수 있다.질 필러는 20분 이내로 시술이 가능하다.다만 질 필러의 효과를 유지하는 기간은 차이가 난다.통상 3년이 지나면 재수술을 할 필요가 있다.또 환자의 상태에 따라 시술하는 필러 수가 달라진다.최소 4개에서 많게는 12개 넘을 수 있다.늘어난 질 점막과 근육 층 사이에 필러를 넣어 좁아진 듯한 엠보싱 구조를 만들어 출산 전의 상태와 유사하게 한다.또 시술 후 만족도가 떨어지면 언제든지 추가 필러 시술을 받으면 되는 편리한 시술법이다. 다만 간혹 실리콘을 주입하는 의사도 있다.아무리 안전이 검증됐더라도 실리콘은 권하고 싶지 않다.비뇨기과에서 남성 성기 확대술에 사용하는 필러를 사용하는 의사도 있다.하지만 그 성분이 여성 질 필러와는 다소 다르고 쓰임의 목적이 맞지 않기 때문에 피해야 한다. ◆대음순 축소·확장술 대음순이 너무 크고 두꺼워서 바지를 입었을 때 불편하거나 마치 남성의 음낭처럼 불룩하게 굴곡이 있어 바짓가랑이에 주름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크고 두터운 대음순에 세균증식이 더 많이 일어나 대음순 축소를 원하는 여성들이 있다.대음순은 소음순과 마찬가지로 여성들이 앉은 자세와 의자와 맞닿는 부위이다.따라서 대음순 축소술을 하면 일주일 정도 불편감을 호소하는 편이다.또 2주일 동안은 자전거 타기와 성 관계도 피해야 한다.나이가 들고 폐경시기가 가까워지면서 오히려 대음순의 지방이 위축돼 쪼그라들기도 한다.질 필러 시술을 통해 다시 젊은 상태로 도톰하게 복원시키기는 것이 대음순 확장술이다.지금까지 설명한 여성 성형술 중 질 성형이나 질 필러는 보통 폐경 전의 여성들에게 더욱 효과적이다.폐경 이후 여성에게도 시술 후 호르몬 연고나 호르몬 질 좌약, 경구용 호르몬제 등을 사용한다면 젊음을 오랫동안 유지하며 더욱 만족해 할 것이다.실제 60~70대 여성들도 여성 성형술을 하는 경우가 제법 있다.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요즘 나이에 얽매이지 말고 지금이라도 20~30대의 자신감을 회복하는 것도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일 것이다. 도움말=여준규 수성·달서 여성메디파크병원 대표원장 이동률 기자 leedr@idaegu.com

전립선암이 뭔가요?

전립선은 남성에게만 있는 장기로 방광 바로 아래에 위치하며, 전립선의 안쪽으로는 요도가 지나간다.전립선에서 발생하는 가장 흔한 질환은 전립선 비대증인데, 나이가 들수록 점점 커지는 전립선이 안쪽으로 요도를 눌러서 소변이 잘 안 나오거나 화장실을 자주가게 되는 질환으로 대부분 연세가 많은 어르신의 고민거리로 꼽힌다. Q=전립선비대증이 진행되면 전립선암에 걸리나요?전립선비대증과 전립선암은 전혀 다른 질환으로 전립선비대증이 오래 됐다고 암으로 진행되지는 않습니다.이런 전립선암은 남성에서 생기는 암 중 매우 흔한 질환으로 미국이나 유럽 등 서구에서는 남성암 중 1위를 차지하며,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점점 증가해 현재 5번째로 많은 남성암입니다. Q=어떤 증상이 있을 때 전립선암을 의심해봐야 할까요?전립선암이 진행되면 전립선비대증과 같이 방광이 막혀 소변을 보지 못하거나 소변에 피가 나고, 자기도 모르게 소변이 세는 등의 다양한 증상이 나타납니다.또 암이 진행돼 뼈에 전이가 되면 통증이나 골절, 척수압박에 의한 신경증상 등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암의 초기에는 아무 증상이 없는 경우가 많은데 최근에는 조기에 발견되는 전립선암이 많아졌습니다. Q=증상이 없으면 전립선암은 어떻게 발견하나요?전립선암의 진단에 가장 도움이 되는 방법은 전립선 특이항원 검사입니다.혈액에 있는 전립선의 항원을 찾는 검사로 최근은 대부분의 건강검진에 포함돼 있습니다.또 소변보기가 불편해 비뇨의학과에 오시면 반드시 이 검사를 시행합니다.만일 이 수치가 3.0ng/㎖ 이상이 나오면 전립선암의 가능성이 있으므로 반드시 전립선 조직검사로 암의 유무를 확인해야 합니다. Q=전립선암으로 진단되면 어떤 치료를 하나요?전립선암의 치료는 병의 진행 단계에 따라 달라집니다.전립선암은 5년 생존율이 90%가 넘는 진행이 매우 느린 암 중 하나입니다.그러므로 초기 전립선암을 가지는 고령의 환자에서는 드물게 치료를 하지 않고 지켜보는 경우도 있습니다.하지만 대부분의 환자에서는 적극적인 치료를 추천하며 암이 주변으로 퍼지지 않고 전립선 안에만 국한된 경우는 주로 수술을 이용한 치료를 합니다.다른 장기로 퍼진 전이 암의 경우에는 호르몬 치료 등의 전신적인 치료를 하게 됩니다. Q=전립선암의 수술에 로봇을 이용한다는데 정말로 효과적인가요?전립선에 한정된 초기의 전립선암은 대부분 전립선을 제거하는 수술로 완치가 가능합니다.과거에는 복부를 30㎝정도 여는 개복수술이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방법이 없었는데 이런 개복술은 정밀한 수술이 어려워 수술 후 자기도 모르게 소변이 세는 요실금과 발기부전이 많이 나타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하지만 최근 로봇수술이 도입된 후로는 개복할 필요가 없으며 수술 후 통증이 적고, 정밀한 수술이 가능해 수술 후 요실금과 발기부전이 획기적으로 줄었습니다.최근 미국은 전립선암 수술의 80~90%가 로봇수술로 진행되며 국내에서도 로봇수술의 비율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Q=이미 다른 장기로 전이가 된 전립선암은 항암치료를 하나요?대부분의 전이된 암에서 항암치료를 하는 것과 달리 전립선암은 항암치료 이전에 호르몬치료를 시행합니다.전립선암은 남성호르몬의 영향을 받아 성장하는데 이 치료는 우리 몸의 남성호르몬을 차단해 암의 성장을 멈추게 하는 치료입니다.대부분의 환자에서 효과를 보며 항암치료와 같은 고통이나 큰 부작용이 없고, 환자에 따라서는 10년 이상 암의 진행이 억제되는 경우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하지만 어느 시점에 이르면 전립선암이 더 이상 호르몬 치료에 반응하지 않고 그 이후의 치료는 항암치료나 이차호르몬치료 등 다양한 최신치료를 시행합니다. Q=전립선암을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나요?동물성 지방은 식이요인 중 가장 유력한 전립선암의 위험인자이므로 과일과 채소를 많이 섭취하고 육류를 적게 섭취하는 것이 좋습니다.그리고 50세 이상에서는 전립선암의 조기발견을 위해 매년 전립선특이항원을 측정해 보는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도움말=계명대 동산병원 비뇨의학과 김병훈 교수이동률 기자 leedr@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