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한수정특별한 예술 작품은 독특한 공간에서 나온다. 공간과 창의성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공간을 만들고, 공간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공간은 문학, 예술, 학문, 사고력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2007년 미국 라이스 대학교에서 학생 100명을 상대로 실험했다. 학생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층고가 약 3m와 2.4m인 방에서 시험을 치게 하고는 어느 쪽이 더 창의적인 답지를 내는지 살펴봤다. 천장이 높은 방에서 시험 친 학생들이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물체 간 연결고리를 찾는데 더 뛰어난 답안을 냈다. 높은 천장이 생각의 폭을 넓혀 창의성을 고무시켰기 때문이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론 프리드만의 ‘공간의 재발견’에 나오는 이야기다.한국의 산천은 정자가 있어 그 문화적 가치가 살아난다. 대부분 정자는 그 지역의 학문과 문화 활동의 거점이었다. 정자는 실생활에 없어도 되지만 비실용적 공간은 아니다. 정자는 휴식과 만남, 일탈의 장소이면서 창조와 생성의 공간이며 학문적, 예술적 영감을 자극하는 상상력 발전소이기도 하다. 전국 각지에 산재해 있는 대부분 정자는 강을 내려다보는 언덕, 기암절벽과 낙락장송이 있는 깊은 계곡 등 풍광이 좋은 곳에 있다. 그런 장소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멍때리기’에 좋은 장소다. 숲 멍, 물 멍, 강 멍, 달 멍, 구름 멍, 노을 멍하며 유유자적하다 보면 일상에서는 얻기 어려운 창조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태백산 이남의 절경지로 유명한 경북 봉화군 춘양면에 있는 한수정(보물 제2048호)은 1608년(선조 41년) 석천 권래가 조부인 충재 권벌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자다. 권벌은 조선 전기(1478~1548, 성종 9년~명종 3년)의 문신으로 한성판윤, 예조판서, 병조판서, 우찬성, 원상 등을 지냈고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학봉 김성일의 옛집인 안동 임하의 몽선각, 찬성 권벌의 옛집인 내성의 청암정, 정언 권두경의 세거지인 춘양의 한수정은 모두 태백산 남쪽 물가에 자리한 이름난 마을들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권벌의 5대손인 창설재(蒼雪齋) 권두경(1654~1725)의 문집 ‘창설재집’에 수록된 ‘한수정기(寒水亭記)’에는 당시 한수정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태백산 아래 산수를 이야기하자면 춘양만 한 데가 없고, 춘양의 자연 풍광은 한수정만 한 곳이 없다. 석천공이 보고 즐거워 물가 터를 다듬어 정자를 짓고 언덕을 높여 대를 만들었다. 남쪽은 방으로 햇살을 받아들이고, 북쪽은 마루로 구름 머문 산을 바라보기 좋다. 대는 여러 무(畝)로 꽃과 과실나무를 심었다. 거연헌은 마을 사람 임씨가 쓰다가 불을 내서 탔다. 지금 그 터가 한수정 남쪽 백 수십 보에 있다.”‘찬물과 같이 맑은 정신으로 공부하라’는 뜻을 가진 한수정(寒水亭)은 ‘풍류형 정자’라기 보다는 ‘학문형 정자’다. 그래서 한수정의 주변 환경과 건축 구조는 독특하다. 한수정은 정자 설립 취지에 맞는 최적의 입지를 먼저 선정하고 안동권씨 집안의 가풍과 가치관을 반영하여 특별한 조경 수법으로 건축됐다. 건물의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기와집에 바닥을 1단 높게 하여 온돌방 2칸과 사방에 마루를 둔 ‘T’자형으로 되어 있다. 마루와 온돌방의 조화가 특이하고, 팔작지붕과 맞배지붕이 만난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사면이 개방된 마루는 바람이 잘 통하고 온돌방은 용도에 따라 두 곳으로 나누어 실용성을 더해준다. 정자의 전면과 옆면, 뒷면의 일부에 계자 난간이 둘려 있다. 정자 앞쪽에 출입문인 주문이 있다.영조 18년(1742년) 후손 권만이 지금 모습으로 고쳐 지으면서 쓴 상량문에 “상하좌우로 전망이 트이고 춥고 더울 때 알맞도록 집이 꾸며져서 집안 일가와 손님과 벗이 그치지 않고 찾아오고, 둘린 못물은 거울처럼 맑아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를 굽어볼 수 있다”라고 썼다. 한수정을 찾아와 주변 열두 경승을 노래한 빼어난 시들이 여러 문인의 문집에 전하고 있다. 우리는 ‘조선시대 시문학을 풍성’하게 하는 데 기여한 한수정의 특별한 공간 미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자의 3면은 막돌로 축대를 쌓아 만든 와룡연이라는 연못에 둘러싸여 있다. 와룡연 주변엔 큰 나무를 심어 연못과 정자를 보호하듯 굽어보게 했다. 연못과 정자 사이에는 초연대라는 바위가 있다. 예전에는 이 바위 위에 화초와 과실나무를 심어서 작은 동산을 만들었다. 정자 주변에는 높은 대를 꾸미고 연못 주변은 철 따라 모습을 달리하는 꽃나무를 즐길 수 있도록 한 구성이 절묘하다. 전체적으로 자연과 잘 어우러진 한수정은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을 준다. 보호수로 지정된 300년이 넘은 느티나무와 아름드리 소나무들은 정자의 경관을 더욱 수려하게 만들고 있다. 한수정은 높낮이 조절이 만들어 내는 놀라운 입체감, 독특한 평면구성과 건축 구조, 온돌과 마루의 배치, 연못의 구성, 조경 등으로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다.한수정은 직선과 곡선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곡선미가 더 돋보인다. 정자를 휘감아 도는, 용이 누워있다는 뜻을 가진 와룡연의 곡선 궤적은 부드럽고도 아름답다. 와룡연을 따라 한 바퀴 돌아보면 연못이 그려내는 곡선의 묘미에 취하게 된다. 화가 훈데르트바서는 “직선에는 하느님이 없다”라고 말했다. 빠른 길, 지름길만 찾는 사람은 마음과 영혼을 움직일 수 있는 감동적인 표현법을 찾지 못한다. 우회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 좋은 표현이 나온다. ‘단숨에’, ‘단칼에’ 원하는 것을 얻겠다는 발상은 직선의 성급함과 조급함을 나타낸다. 직선은 일방적으로 밀고 당기고, 자르고 구분하려고만 한다. 세상의 아름답고 고귀한 것들 대부분은 직선보다 곡선이 많다. 우회의 여유가 많은 것을 담고 포용할 수 있다. 한수정은 풍광이 수려한 산과 강, 절벽 바로 옆에 지어 그것을 바라보는 건축물이 아니라, 이상적인 산천을 먼저 머리에 그리고 그것을 집 안에 구현한 인공적인 무릉도원이라고 할 수 있다.정자는 한양에서, 정치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에 있어야 제격이다. 운치 있는 정자는 포스터모던을 추구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중앙 집중과 이성 중심주의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내포하고 있는 사상적 경향의 총칭이다. 탈 중심 다원적 사고, 탈 이성적 사고가 핵심이다. 변방의 정자는 탈 중앙정치, 지역적 다양성과 자부심을 의미한다. 변방에 있으면서 끊임없이 중앙정가를 갈망한다면 즐겁고 행복하지 않다. 사정이 어떻든 초야에 있는 선비들이 중앙정치에 끼친 영향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변방은 중앙의 무게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이 세상 만물을 살펴볼 때 주변 없는 중심은 없다. 주변과 중심은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상호 연관성 속에 있어야 서로가 상생할 수 있다. 주변을 무시한 채 자기중심에 대한 성찰과 반성이 없다면 중심 자체가 위태로워진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현재의 중심을 제대로 알고 바로 세우기 위해서 그 중심을 초월하는 다른 중심축을 가져야 한다. 변방은 가장자리에 있으면서도 언제라도 새로운 중심축이 될 수 있는 가장 가변적이고 역동적인 곳이기도 하다. 변방의 문화였던 한류가 전 세계를 열광시키고 있는 지금 한국의 정자는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정중동(고요한 가운데 어떤 움직임)과 동중정(열정적 움직임 속에 고요함)이 상호 긴장과 조화를 유지할 때 한류는 철학적 깊이를 더하게 되고, 공감과 감동을 줄 수 있는 콘텐츠를 계속 생산할 수 있다. BTS 같은 스타들이 주기적으로 산사, 정자, 고택 등을 찾아 머물러 보면 한류 특유의 역동성에 폭과 넓이, 깊이를 더할 수 있을 것이다.한수정은 기존 정자들에 비해 발상이 혁신적인 공간이다. 한수정의 특이한 구조와 조경을 바라보면 창의성과 상상력을 강조하는 현대의 대표적인 혁신기업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사옥 등이 떠오른다. 4차 산업 혁명을 주도하는 기업들은 우리의 생각 속에 정형화된 사각형의 무미건조한 업무환경과는 전혀 다른 공간을 가지고 있다. 유려한 곡선으로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동대문 디자인플라자(DDP)를 설계한 건축가 자하 하디드는 “삶은 격자무늬 안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라고 했다. 공간이 바뀌면 창조적 발상이 새로워진다. 공간은 변화와 혁신에 필요한 창조적 에너지를 생성한다. 이런 관점에서 한수정은 새삼 주목받을 가치가 있다.문화재는 당대의 언어와 감성으로 끊임없이 새롭게 해석돼야 한다. 정자도 과거의 유산으로 방치되는 유물이 아닌, 과거와 현재, 미래가 서로 소통하며 대화하는 장소가 돼야 한다. 특히 젊은 세대들이 정자에 주목하고 관심을 가질 수 있게 해야 한다. 막말과 빈말, 악담과 저주가 일상화된 시대에 정자 스테이는 우리에게 여유와 여백, 사람이 지켜야 할 덕목, 침묵의 지혜 등을 터득하게 해 줄 수 있다. 비수 같은 ‘한수(寒水)’ 의 의미를 되새기며 한수정 대청마루에 앉아보라. 와룡연을 건너온 청량한 솔바람이 세파에 지친 혼탁한 머리를 깨끗하게 씻어 줄 것이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