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효세자 태실예천군 용문사 뒷산 중턱에 조성된 문효세자 태실. 조선 22대 왕인 정조의 맏아들이였던 문효세자는 1784년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786년 5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 태실은 1930년대 발굴조사 되어 태항아리는 경기도 서삼릉으로 이장되었으나 현재는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다.경상북도의 기념물 제173호, 문효세자 태실을 찾았다. 태실은 예천군 용문면 내지리 소재 용문사 대장전 뒷산 두운암 근처에 자리 잡고 있었다. 뒤로는 산중턱에 감싸 안겨 아늑했고 앞으로는 용문산 계곡이 훤히 내려다보여 막힘없이 시원했다. 찬바람 부는 겨울 끝자락, 오가는 발걸음이 뜸해 한적함을 더했다. 둥근 알 형상의 석실과 태항아리를 안치했던 봉분이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조선조 왕실의 정성을 느끼게 했다. 태어난 지 백일도 되기 전에 능히 병풍 사이의 글자를 분별했다는 총명한 문효세자의 탄생은 정조의 기쁨이자 조정의 경사였다.1782년(정조 6년) 9월 7일 이른 새벽의 일이었다. 문효세자가 태어나자 마치 태양이 떠오르는 듯 붉은 빛 한줄기가 창덕궁 연화당을 비춘다. 정조는 “비로소 아비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며 문효세자의 탄생을 기뻐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정조는 30살이 다 되도록 자식이 없었다. 조선조 임금들의 평균 수명이 40세 남짓이고 보면 늦은 나이에 기다리던 아들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내가 처음 승은(承恩)을 내렸을 때 빈은 눈물을 흘리며 울면서 세손빈이 아직 귀한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했다며 사양했다. 또한 이에 감히 죽음을 맹세하고 명을 따르지 않았다. 이에 나는 빈의 마음을 느끼고 다시는 재촉하지 못했다. 그 후 15년 동안 널리 후궁을 간택했다. 그리고는 빈에게 다시 승은을 내렸으나 거듭 사양했다. 이에 빈이 사사로이 부리는 하인에게 죄를 꾸짖고 벌을 내리자 빈은 비로소 내 마음을 받아들였다. 빈은 진심으로 내 명을 따라 잠자리를 했고 곧 회임을 하더니 임인년 9월에 세자가 태어났다.“에서 보듯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 15년의 구애 끝에 얻은 세자이고 보니 그 기쁨은 말할 나위 없었겠다. 왕자가 태어나자 태실도감에서는 왕자의 무병장수와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태실을 봉안한다. 문효세자의 태실 곁에 서 있는 안내판의 글귀를 옮긴다.용문사와 문효세자태실 안내판. ◆정조의 기쁨이자 조정의 경사태실은 왕실에서 출산이 있을 때 그 태반과 탯줄을 묻은 석실(石室)을 말한다. 예로부터 태는 생명의 근원으로 여겨 소중하게 여겼으며, 특히 왕실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전국에 명당(明堂)으로 골라 태실을 만들고 태를 묻었다. 문효세자(1782-1786)는 조선 22대 왕인 정조의 맏아들로 1784년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5세 때 홍역으로 일찍 생을 마감하였다. 태실은 1930년대에 발굴조사 되어 태항아리는 경기도 서삼릉으로 이장되었으나, 현재 태항아리와 태지석 등 주요 유물은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다. 태실지에는 원래 아기태실비만 남아 있었어나, 2020년 태실 정비 사업을 추진하면서 봉분을 복원하였다. 이러한 태실문화는 조선 왕실문화의 일면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안내판 문구 이곳저곳이 마음에 걸렸다. 안내판 이름이 ‘문효세자태실’이 아니고 왜 ‘예천문효세자태실’이라고 했을까? 예천이라는 고을이 조정을 가두는 느낌이었다. “태는 생명의 근원으로 여겨 소중하게 여겼으며”는 또 뭔가? 짧은 문장 속에 반복되는 ‘여겨’의 중첩이 왕세자를 안내하는 후손들의 무성의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태실의 본질보다 지자체의 홍보를 앞세우는 행정의 손길이 어른거려 씁쓸했다. 문체를 바로잡으려 규정각을 설치했던 정조와 관련된 유적이 아니라 하더라도 한 자, 한 자 문장을 다듬는 최소한의 정성은 보였어야 하고, 왕실의 세자보다 예천을 강조하는 무례는 없어야 했다. 비단에 감싸 모신 태 항아리를 가마에 싣고 밤낮을 걸어 한양에서 이곳까지 그 먼 길을 왔을 태실도감의 그날, 그 순간의 경건한 행렬을 상상해 보라. 이곳 용문사는 문효세자의 태실뿐만 아니라 연산군을 낳은 폐비 윤씨의 태실도 안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널리 길지(吉地)로 알려진 사찰이었음이 분명하다. 용문사 대장전. 뒷길을 오르면 문효세자 태실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인 용문사는 용문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다. 신라 870년 두운선사가 창건했다는 용문사는 갖가지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절을 짓기 시작하였을 때 나무둥치에서 무게 16냥의 은병을 캐어 공사비에 충당했고, 사리탑을 봉안할 때는 오색구름이 탑을 감돌기도 했다한다. 고려 태조 왕건이 신라를 정벌하러 내려가다 이 사찰을 찾았으나 운무가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치 못했는데 어디선가 청룡 두 마리가 나타나 길을 인도했다는 일화가 용문사라는 이름을 갖게 된 배경설화이다. 전국적으로 용문사라는 이름을 가진 사찰은 세 곳이다. 용의 머리 부분인 양평 용문사, 용의 꼬리 부분인 남해 용문사, 그리고 용의 몸통 부분인 예천 용문사가 그곳들이다. 머리도 꼬리도 아닌 용의 한 가운데 부분에 해당한다는 예천 용문사에 태를 묻으며 왕과 조정의 문무백관들은 용처럼 천하를 누비는 굳센 힘을 가진 왕자의 앞날과 왕실의 번성을 기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용문사의 전설이 간직한 청용 두 마리도, 16냥의 은병도, 사리탑을 감돌던 오색구름도 창궐하는 돌림병으로부터 문효세자를 지켜주지 못했다.문효세자는 1786년 5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는다. 세자로 책봉된 지 2년만이었다. 홍역에 걸린 문효세자의 병이 깊어지자 종묘사직에 2번이나 기도제를 올렸으나 허사였다. 사랑하는 세자의 죽음 앞에서 망연자실한 정조는 아비로서의 황망한 심정을 “나는 처음에는 의심하다가 도중에는 믿게 되었으니, 끝내 또 아득하여 꿈인 듯, 참이 아닌 듯하였다. 정을 둘 곳이 없어졌음을 의심하였고, 처지를 바꿀 수 없음을 믿게 되었으며, 이치를 알 수 없음에 아득하여 또 꿈인 듯, 참이 아닌 듯하였다. 만약 세자의 생이 달리 끝났다면 과연 여기에서 그치고 말았겠는가. 나는 일찍이 그의 탄생이 늦는 것을 걱정하다가 다행히 그가 태어나는 경사를 맞았는데, 그가 탄생한 경사를 믿고 부모로서 자식이 병들까 걱정하는 마음은 까맣게 잊고 있다가 이리저리 헤맨 끝에 구할 수 있는 약이 없는 지경에 이르러 영영 이별하게 되었으니, 나는 이때 아비가 된 것이 부끄러웠다.”와 같이 적고 있다.부끄러움을 안다는 것, 임금이 스스로 부끄러움을 말했다는 사실이 눈에 부신다. 여의도와 서초동을 비롯한 방방곡곡에서 자행되는 후흑(厚黑)의 일상에 되비치기 때문일 것이다. 일찍이 맹자는, 나와 타인의 불의를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수오지심’을 갖춘 군자가 나라를 다스려야 백성의 삶이 편안하게 된다고 말하지 않았든가.문효세자의 태항아리 일괄 중 내항아리. 정조가 세자의 묘비에 자신의 심경을 솔직하게 기록한 ‘끝내 또 아득하여 꿈인 듯, 참이 아닌 듯하였다’는 구절보다 더 애절한 표현이 달리 있을 수 있을까. 한 나라의 왕이기에 앞서 한 아비로서 자식을 지켜주지 못한 정조의 상심이 피부에 닿을 듯 절절하다. 문효세자가 죽은 지 5개월, 그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의빈 성씨마저 세상을 떠나 자신이 낳은 세자 곁에 묻힌다. 서울 용산구 지금의 효창공원 자리였다. 정조는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의 묘를, 거동고개라는 언덕 이름이 생겨날 정도로 자주 거동하며 상심을 달랜다. 거동고개를 오가며 정조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사랑하는 이들의 혼령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추정컨대 부끄럽지 않은 아비, 미더운 지아비가 되리라 다짐했을 것이다.잘 알려진 바와 같이 정조는 세종 이래 최고의 성군이자 개혁군주였다. 예컨대 정파에 관계없이 능력 있는 인재를 고루 등용한 정치개혁, 육의전을 독점한 시전상인들의 시장 독점권을 폐지한 경제개혁, 공노비의 해방을 추진하는 등의 사회개혁, 조선 사신의 열하 방문을 기점으로 조선과 청나라의 양국을 우호적인 동맹 관계로 변화시킨 외교적 성과, 규장각 설치를 통해 방대한 서적을 출판한 전례 없는 문화적 업적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역사에 빛나는 자랑스러운 임금이 된다. “이날(1800년 6월 28일) 유시에 상은 창경궁의 영춘헌에서 승하하였는데 이날 햇빛이 어른거리고 삼각산이 울었다. 앞서 양주와 장단 등 고을에서 한창 잘 다라던 벼 포기가 어느 날 갑자기 하얗게 죽어 노인들이 그것을 보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거상도(居喪稻)이다’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대상이 났다”고 전하는 바와 같이 정조는 만백성으로부터 존경받는 성군이었다.경상북도는 몇몇 지자체와 함께 태실유적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라 한다. 조선 왕실의 태실문화는 서양은 물론 인근의 중국, 일본 등에도 없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문화유산으로, 생명존중이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구현에 부합한다는 점에서 세계유산으로서의 의의가 충분할 터이다. 갈수록 생명은 경시되고 날로 인구는 줄어들어 머지않아 나라의 존립이 걱정되는 작금 현실에 비추어보면 더욱 그렇다. 유네스코 등재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앞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태실유적의 현재적 의미가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문화유적을 다룸에 있어서 명심해야할 것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자세이다. 현재와 단절된 과거란 그 가치가 사상된 화석일 뿐이다. 요컨대 태실유적이 참다운 의미를 가지려면 생명을 경시하는 현대사회에 대한 반성적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외항아리 소박한 생각, 뜬금없는 발상이겠지만, 전국에 산재된 태실을 잇는 태실 순례길을 만들면 어떨까. 이곳저곳 산재되어 그 길이 아무리 고되다 하더라도, 태실을 순례하는 여정이 생명을 존중하는 조상들의 숨결을 체감하고 인면수심의 현실을 반성하는 기회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럴 수 있다면 적어도 어린 생명을 굶겨서 죽이고 때려서 죽이는 참담한 소식은 줄어들 테니까. 태실유적의 의미가 도처에서 자행되는 죄 없는 생명의 죽임을 막는, 생명을 지키는 살림의 길로 자리매김 될 수 있다면 유네스코에 등재되는 것보다 더 자랑스러운 민족문화의 유산이 될 터이다.문효세자 태항아리가 이장되었던 경기도 서삼릉. 현재는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다. ◆태실문화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문화유산문효세자의 태실을 떠나 폐비 윤씨의 태실로 이어진 용문산 능선을 걸으며 생각한다. 세자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한 태실문화는 한낱 풍수지리에 기댄 봉건사회의 풍속일 따름일까? 아니다, 그렇지 않을 것이다. 생물학적 생명만 생명이겠는가. 문효세자의 생명력은 만백성의 기억 속에 조선조 22대 개혁 군주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역사 속에 살아있는 것이리라. 정조대왕의 재위 20여년의 치적이 세자의 죽음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아비가 되겠다! 다짐했던 그날의 통절함과 무관하지 않다면 말이다.강현국/시인김창원 기자 kcw@idaegu.com